둘레길.올레길/지리산둘레길 4차

지리산둘레길4차 3구간 역방향 인월면 중군리 수성대 ~인월면ㆍ리 월평마을입구 천변 4.7km 2025.1.19

방극만 2025. 1. 20. 07:30





<수성대>
선화사를 지나 호젓한 산길을 걷다 보면 반가운 계곡이 나오는데 수성대 계곡이다. 인근의 중군마을과 장항마을의 식수원으로 쓰일 만큼 맑고 깨끗한 물이다.
수성대는 과거 전란 때 외성을 수비하는 수성군이 잠복한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다.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두른 이곳의 지형이 적이 드나드는 모습을 세심히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부터 지리적 요새였던 이 근방에는 자연마을로 중군, 돌재, 백련암, 수성대마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중군마을 외에는 모두 폐촌이 되었다.


<선화사>
전북 남원시 인월면 중군리 261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선화사에서 소장 중인 불교경전 '묘법연화경'은 조선 초기 불교판본 및 서지학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선화사가 자리하는 덕두봉(德頭峯)은 일명 흥덕산(興德山) 혹은 용산(龍山)으로 불렸고, 운봉읍 화수리와 인월면 중군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덕두봉은 산기슭의 ‘용마름산’이 옛적에 자꾸 움직이자 어느 도사가 칼로 산을 갈라서 석축을 쌓고 산을 못 움직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을 갈라 놓아서 용이 멈추어 형성된 산을 용산이라 이름하였고, 현재도 ‘용산리‘라는 지명이 실재하고 있다.


전투군단에 前.中.後군과 선봉부대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중군이 주둔한 연유로 中軍里 또는 中軍洞이라 불리어졌단다.


<중군마을>
람천과 풍천이 만나 흐르는 인월면은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일찍이 상가가 발달하였고 조선시대 때부터 전라도와 경상도 주민들이 이용해 온 인월 재래시장은 3, 8일에 열린다.
구인월교에서 람천을 따라 걷다 보면 재미난 벽화가 그려진 중군마을을 만난다. 
지리산 북부로 가는 관문이자 길목인 중군마을은 삼한시대부터 군사 요충지로서 고려시대 전투군단이었던 중군(中軍)이 주둔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는 하지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동네 부인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에서 통곡을 하며 무제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군마을 유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중군리는 삼한시대에부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지역에 위치하여 군사상의 요충지였으며, 마한 54개국 중 고랍국(古臘國)이 위치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고 고려 시대에는 운봉현에 속하였다.
고려 군대의 기본 편성은 중. 전. 후. 좌. 우군의 오군이었는데, 중군은 그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한 부대이며 고려 오군 중 중군이 주둔한 곳이므로 마을 이름을 중군리라 하였다 전해진다. 
고려 말 1380년 삼도 순찰사였던 이성계의 황산대첩 이후 1385년경(고려 우왕 10) 배씨(裵氏) 일가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590년 경 배씨족이 쇠퇴하면서 전주 최씨, 김해 김씨, 안동 권씨, 남원 양씨 등 4개 씨족이 정착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월고원
지리산 자락 삼정봉을 넘어 해가 뜨고,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달빛에 물들기 시작하는 인원고원은 예로부터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던 묵객들이 소회를 남기는 원고지였다.
인월 사람들에게 달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온 소망이자 기다림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연을 날리고 마음에 달을 하나씩 품으니 모여 인월의 인심이 되었다.


인월의 지정학적 위상 변화

인월은 삼한시대 진한에 속하였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역원(驛院)이 설치되며 운봉헌 인월역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팀에 의하면, 인월역은 서쪽의 운봉·남원 방면과 동족의 함양 냉면을 연결하는 교통로였는 데 서쪽으로는 남원 응령역, 동쪽으로는 함양 제한역과 연결되었다.
인월역은 고려시대에는 남원도(南原道)의 소속 역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오수도(獒樹道)의 소속 역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며 역노 15명, 역비 13명, 역마 4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인월역은 폐지되었다.
문헌상 기록으로 미루어 인월이란 아름이 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940년경 부터로 추정된다.

흥부전의 시작
인월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효시이자 고전소설의 백미인 흥부전이 태어난 곳이다.
함양과 경계한 인원 성산마을에서 태어난 흥부가 많은 질곡을 이겨내고 오봉산을 넘어 봉화 산 아래 복덕촌을 찾아가는 '역전의 인생역정이 흥부대박 길(14km)로 남아있다.

인월 속 가야와 삼국시대
유곡리 성내마을에는 가야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우리 인월이 당시 운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기문가야의 영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 인월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으로서 아영의 성리에서 시작된 성리산성의 동북쪽 토성이 있었던 성내마을이나 합미성(속칭 할미성)의 북쪽에 있었던 성산마을의 지명은 삼국시대의 흔적을 말해준다.

마을이 품고 있는 역사의 흔적

중군(中軍): 임진왜란 시 전.중.후, 선봉대 중 규모가 큰 중군 주둔지
서무(西茂): 고려말 왜적퇴치를 위한 이성게 부대의 서쪽 매복지, 피바위 (람천)
동무(東茂): 고리말 왜적퇴치를 위한 이성계 부대의 동쪽 매복지
사창(社倉): 구휼미를 비축하던 관리청이자 창고이면서 이성계 부대의 군량미 창고
유곡(四谷): 대장군석이 있음 (과거 사찰의 유물로 추정)
성내(城內): 신라,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신라에 속했음
상우(上牛): 조선시대 군사 주둔지
성산(城山): 팔랑채(513m. 임진왜란시 조경남 장군 등 8명의 장수가 왜적 퇴치)

달빛으로 이긴 싸움, 이성계의 한산대첩
1380년(고려 우왕5년) 영남을 거쳐 북진을 하던 왜장 아지발도를 황산(荒山)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성계 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며 달을 뜨게 해 주소서" 하고 간구하니 칠흑 같은 그믐밤 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천지를 밝혀주었다.
이 때를 노려 이성계 장군의 화살이 적장의 목을 꿰뚫었다.
이에 기세가 오른 아군이 왜군을 섬멸하니 람천에는 적들이 흘린 피가 흥건하였는데 그 핏자국이 바위에 남아 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승전이었다.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 하여 이 곳을 인윌(引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홍부대박길
흥부놀부의 출생지인 인월 성산마을에서 윗까막제골 옆 산림도로를 넘어가면 흥부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된 마을인 봉화산 아래 아영 성리로 연결된다.
흥부의 인생역정을 말해주는 고난길-희망길-고진감래길이 이어지는데 총 14km이다.

지리산둘레길
민족의 명산 지리산을 두른 산길과 마음들을 만날 수 있다.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고 살아 갈 날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지리산 둘레길은 인월에서 출발한다.

달 벚꽃길
람천 뚝방 길을 따라 걸으면서 삼정산을 넘어오는 달을 보면 하늘의 세계를 옮겨놓은 듯한 활홀경에 빠진다.
노인요양시설인 경애원 뒤에서 부터 선인들이 달맞이를 하며 음풍농월하던 영월정까지 2km 벚꽃길은 비록 거리는 짧지면 달과 함께하는 감동은 길다.

구수한 사람들의 풍물장터
예로부터 인원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풍물 장터였다. 지리산에서 나온 약초와 산나물을 비롯하여 경상도에서 올라온 수산물들과 소금들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운봉과 함께 판소리 광대들의 굿마당이 벌어졌는데 5일장 풍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통시장 3일 8일) 지리산으로 가는 관문이지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인월은 할머니가 담은 된장

처럼 구수한 고을이다.

토속 먹거리 그 별미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전동 전통시장에는 계절마다 다른 산나물들과 약초들이 팔린다.
투박한 인월말씨가 오가며 에누리의의 정을 주고 받는 전통시장은 조선시대 역참(인월역)이 있었던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역주민들이 애써 가꾼 농산물이 직거래되며 걸쭉한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목로주점도 남아 있다.
흑돼지, 염소탕, 자라탕, 순대국밥, 어죽, 순두부, 청국장. 추어탕은 인월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