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전라남도

선암사~송광사(장박골삼거리~송광사) 2-2 2023.08.13

방극만 2023. 8. 14. 20:44



12:23 장박골삼거리
12:47 연산봉사거리
13:05 연산봉 해발 851m
13:31 송광굴목재에서 송광사로 계속해서 내리꽂는 길과 옆 계곡을 따라 내려 가다.
14:33 연산봉4거리에서 출발해서 오는 길과 마주하는 토다리
14:51 수석정교 삼거리
15:02 송광사 도착

(08:02 선암사 주차장에서 출발
08:26~08:52 선암사 투어
08:52 본격적인 산행을 위해 선암사 좌측 대각암 300m 전 입구로
08:53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08:58 대각암 삼거리
09:00 작은굴목재 ㆍ비로암 삼거리
10:17 행남절(향로암) 터
10:58~11:43 조계산 해발 888m의 장군봉
12:05 접치삼거리)


  
  장박골
선암사와 송광사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한 두 사찰의 중간지점 가장 깊은 곳에 남쪽을 향해 자리잡은 조계산을 대표하는 골짜기 이름이다.
  장막동은 帳幕洞이란 한자 이름에 그 어원이 있다.
  송광사의 1800년대 기록인 '송광사고'의 골짜기 이름편과 송광면(조계산) 고지도에 있다.
  선암사 고서에도 장막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장막이란 장수나 병사들의 막사를, 동은 우리말에서 골짜기를 뜻한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장군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는데 신비하게도 장군(봉)의 배후 골짜기인 장박골의 모양 또한 둥글게 휘장을 친 장군의 막사가 연상되는 모양으로 장막동이라 한 것이다.
  장막골이 장박골로 변화하는 과정은 언어의 발성구조 때문으로 장의 'ㅇ'이 박의 'ㅂ'과 만날 때 막의 'ㅁ'보다도 더 작은 울림현상이 발생하여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연산봉에서 바라본 호남정맥 조계산 정상 장군봉으로 우린 장군봉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접치3거리, 장박골 3거리, 연산봉4거리를 지나 해발851m인 이 곳 연산봉에 왔다.
  접치3거리부터 장군봉, 큰굴목재까지는 호남정맥 길.
  



  연산봉은 주봉인 장군봉과 함께 조계산의 대표적인 두 봉우리 중 하나이며 조계산의 서쪽 사람들은 '효령봉'이라고도 부른다.
  조계산이 고려 말 '조계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기 전까지는 선암사측은 장군봉을 청량산으로 송광사(당시는 수선사) 측은 연산봉(효령봉)을 송광산 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두 산이 조계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 난 것은 고려 희종 4년 조계종의 보조국사가 수선사에서 정해결사의 기치아래 새로운 승풍 쇄신운동을 통해 백성들과 지도자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조계종'이라는 시대적 가치의 상승으로 왕명에의해 통합 된 조계산으로 다시 태어 났다.
  
  


  송광굴목재
  굴목재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왕래하는 지름길이다.
  1600년대 이후 양사 고승들의 교류기록과 보리밥집 아래 장안마을에서 풍암대사를 필두로 송광사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현재 보리밥집 일대가 두 절의 경계지역인 '지경터라' 불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두 절간의 통행은 물론 장안계곡 아랫마을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무시로 드나들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1700년대 초의 조계산 지도에는 굴목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으며 1926년 육당 최남선의 남도순례길로 그의 기행문인 '심춘순례'에 굴목재가 등장하게 되며 1960년대 국내여행의 대가였던 당시 이화여대 조팔대 교수가 우리나라 여행 산길의 제1번지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송광굴목재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홍골을 따라 계속 내려 간다.


  천자암봉과 연산봉의 굴목재에서 발원해서 홍골을 따라 내려 오는 물에 한 참을 빠져 놀다 옴.


  연산봉4거리에서 내려오는 루트를 지리산 피아골과는 비교가 되지않지만 물이 철철 넘쳐 흐르는 계곡을 여러번 횡단하는 길인데 장관을 보지 못하고 우린 선암사에서 넘어오는 송광굴목재에서 내려 왔다.

사적 제506호.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한국 불교의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의 순천 송광사로 손꼽힐 정도로 크고 유명한 절이다.


  송광사 삼청교三淸橋 및 우화각羽化閣
  삼청교는 일주문을 거쳐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계곡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삼청교는 능허교凌虛橋라고도 하는데 네모난 돌 19개로 만든 무지개 모양(虹橋)의 다리이다.
  1707(숙종33년)에 다리를 만들고 1774년(영조50)에 보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화각은 삼청교 위에 있는 건물을 말한다.
  우화각의 지붕을 입구에서 보면 여덟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보이고 입구 쪽에서 보면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처럼 보인다.
  우화각 안에는 송광사를 찾았던 옛 문인들이 쓴 많은 시가 걸려 있다.
  우화각에 걸린 '송광사' 현판 글씨는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이 썼다.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인 임경당과 계곡물이 흐르는 우화각 아래 능허교(삼청교)로 선암사에는 승선교가 멋지다.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인 임경당과 계곡물이 흐르는 우화각 아래 능허교에서 본 침계루 변 냇가 신평천 모습으로  선암사에는 승선교가 멋지다.

  
   1951년 소실 후 1988년 송광사 8차 중창 당시 재건
  대웅보전에는 삼세(과거ㆍ현재ㆍ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며 각 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ㆍ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시고 있다.
  108평 규모이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1985년에 명부전(冥府殿)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장전을 세웠는데, 여기에 필요한 금액을 금호아시아나 그룹 박인천 초대 회장이 미리 시주했다고 한다.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각전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 중창 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풍경[3][4] 과 석탑[5], 석등이 없기 때문에 송광사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6]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 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인 셈.

3가지 명물도 있는데,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밥통[7], '능견난사' 라고 하는 음식을 담는 그릇들[8], '쌍향수' 라는 향나무[9]. 이 3가지다.


  한국의 3보[10] 사찰로도 꼽히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범어사, 구례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뛰어난 승려를 많이 배출한 곳[11]답게 여러 고승들이 나왔다. 송광사의 송광(松廣)이란 이름에서 松(소나무 송)자를 파자하여 十八公으로 풀이, 고승 18명이 나오게 될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송광사 연혁[편집]
신라 말 혜린 선사가 송광산에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고려 신종 때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면서 발전하였다.

또한 고려의 대선사이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옮기려고 터를 잡는 중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리자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지자 그 뒷등을 솔개가 내려앉은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불렀다고 전해오는데, 최남선은 이 전설에 따라 송광을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고도 풀이했다. 다른 유래로는 예로부터 조계산에 소나무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사찰 이름도 송광사라 불렀다는 것이 있다.

이후 산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면서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지금의 송광사로 바뀌었다. 지눌의 제자 혜심이 중창한 뒤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 절에서 배출한 국사는 지눌을 비롯해 16명이나 되어[1][2]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요한 승보종찰이라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철 스님 등 해인사 위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약간 밀리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르면서 폐사에 이르렀으나 승려 응선과 부휴가 천자암, 보조암, 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하고 동행랑, 천왕문 등을 세웠었다. 1842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져 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직전에는 항일 의병을 돕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기에 일제에 의해 사찰 건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는 승려 설월과 율암이 용화당, 명성각 등을 보수하고 장원문, 사감고를 새로 지었다. 이후 여수, 순천사건과 6.25 전쟁으로 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불탔는데, 그 뒤 승려 취봉과 금당이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대웅보전은 1988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201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18세기 조선 시대의 고승 묵암당 최눌(1717∼1790)의 것으로 추정되는 진영이 송광사로 반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