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올레길/지리산둘레길 5차

지리산둘레길5차 19구간 방광~오미(역방향) 12.3km 2025.06.01

방극만 2025. 6. 2. 02:51



07:07 ~ 07:40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유물전시관 주차장에서 아침 식사 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참새미마을 회관으로


운조루 유물 전시관


아쉬운 점

관람시간이 10:00부터 인지 화장실 개방이 되어 있지 않아 차를 놓고 반대 편인 방광마을로 가 둘레길을 시작하는 우리에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슴을 느꼈다.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참새미 마을에서 지리산둘레길 19구간 12.3km 트레일 시작


07:51 지리산참새미마을 주차장에 오니
행복과 기쁨이라는 꽃말의 자주색 감자(馬鈴薯)꽃이 오늘 우릴 반기는데 오늘 하루 기대가 크다.
어떠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안겨다 줄지 기대해 본다


소원바위

방광권역마을의 소원바우는 본래 계곡에 자리잡고 있던것으로서 무당들이 자연의 신비스런 힘이 있다고 하여 굿을 하던 바위 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막에 있는 문명은 척박한 땅보다 하늘을 더 숭배하였기에 절대 자를 기렸으나,
우리민족은 풍요로운 땅에서 살았기에 하늘 뿐만 아니라 땅의 온갖 생명과 물질들에 대해서도 자연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하였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그들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을 경이롭게 바라 봤는데,
아마도 수억살을 살면서 깨지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 바위에게도 모종의 경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07:54 지리산참새미마을에서 출발 인증샷 후 오미리 운조루로
산동 12.7km, 오미 12.3km


참새미에서 자주색을 보았으니 방광에서 핀 하얀 감자꽃을 담아보라는데 자기 찍어주는 줄 알고 포즈를 취하다 그만 폭소의 기쁨이 먼져 다가 온다.


하얀감자꽃 촬영 삼매경


풀협죽도 : 사랑의 고통


방광마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남양 홍씨가 피신해 거주한 후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서 판관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
즉 판관이 팡괭이로 변했다가 다시 방광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다른 전설도 있다.
지리산 우번대라는 암자에 노승과 사미스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천은사 뒤 계곡을 오르다가 사미스님이 남의 밭에서 조 세 알을 손에 쥔 것을 본 노승이 '너는 주인이 주지 않은 조를 가졌으니
주인집에서 3년간 일을 해 빚을 갚으라"고 말하면서 사미스님을 소로 변신시켰다.

그 날 밭주인이 소를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소가 여물 대신 밥만 먹었고,
쇠똥이 땅에 떨어지면 빛을 내면서 곡식이 잘 자랐다 해서 방광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어릴 때부터 쑥쑥 자라고 크게 자라며 오래살고, 또한 가지가 넓게 퍼지기 때문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때문에 마을 어귀에 쉼터 겸 보호수로 많이 심었고, 느티나무는 오늘까지 시골마을 곳곳에 나이 든 노거수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방광권역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들은 모두 당산나무 입 니다.
당산나무란 크고 오래 사는 영험한 나무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특별하게 아끼고 기리는 나무를 뜻합니다 방광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날, 공북마을에서는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날인 12월 30일에 왼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을 이어 당산제를 올렸습니다.


잊혀져 가는 옛 방앗간


자손만세번영은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08:13
오미 11.6km, 방광 0.7km


방광마을 앞 손 모내기에 바쁜 할머니 허리 구부러지는 것도 모르고(당연히 알지만 모르는 채) 바삐 살아 가신다.





08:16
오미 11.4, 방광 0.9km


구례딸기 하우스에 누렇게 익은 밀밭 아래로 모내기가 끝난 논에 물이 방방하다.


수한마을 유래

우리마을은 민족의 영산이요,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 아래 자락의 화엄사와 천은사 그리고 섬진강물이 어우러지는 이곳에 최초 경주김씨 3세대가 선조 25년 임진왜란(1592년)을 피해 개기한 후, 대대손손 풍요롭고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농촌마을 로 변모해 가고 있다. 원래 마을이름은 물이 차갑다 하여 물한리 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한마을로 개칭되었으며,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 내려오는 물과 암반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은 장수촌의 비결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여순반란사건 (1948년) 당시 지리산에 은거했던 빨치산의 소행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오면서, 특히 1950년대 새마을사업 등으로 마을을 재건하여 이제는 지리산 둘레길 거점마을로서 방문객들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다.
조상들의 피땀 어린 정성을 감사하면서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소중한 마을유산으로 물려주겠다는 주민들의 뜻을 여기에 담는다.


08:30
오미 10.7km, 방광 1.6km


08:35 수한마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 잠간
오미 10.5km, 방광 1.8km



08:45 어깨가 빠갛게 달아 오른 것이 일을 많이 도와 드렸나보다 말을 건네니 어제 서울에서 내려와 돕고 있다며 힘든 기색으로 마늘 수확을 한 참동안 바라만 보면서 쉼을 갖는다.


이 곳 구례는 수로가 잘 되어 있어 농사가 힘들어도 그나마 한층 수월할 것 같다


08:49  황토정사


08:58 어느 도시인 별장으로 잘 가꾸고 사는 집 앞 텃밭이 있어 순천에서 왔다는 분이 고맙게도 상추를 한 움큼 주었다


09:03 감농사가 그냥 지어지는게 아니다 세 연세 많으신 분들의 고군분투 감밭 풀제거 작업이 땀방울로 구슬이 맺혀지는 순간을 인사 건네며 지나니 반가히 맞아 주신다


콩과류


족제비싸리


경취에 기분에 취해 가다보면 자칫 지나치고 마는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렇게 산길이 이어지고


09:25 오미 8.6km, 방광 3.7km
지리산 반달곰 생태학습장 예정지 ?





09:46 마산면 황전리 구례화엄사 입구
오미 8.0km, 방광 4.3km


구례화엄사 입구 지리산국립공원 전남사무소


11:09 오미 4.8km, 방광 7.5km


11:15 삼밭재등산로 갈림길
오미 4.6km, 방광 7.7km


11:22 사방댐 공사 중


꿀풀(꽃), 가지골나물, 꿀방망, 하고초, 夏枯草, 연밀, 燕蜜 / 꽃말 : 추억


11:40 상사마을 입구
오미 3.5km, 방광 8.8km



오미 - 방광/상사마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오미마을에서 광의면 방광리 방광마을을 잇는 12km의 지리산둘레길

구례분지를 보면서 통로와 숲길을 걷는 아기자기함이 재미있다 지리산탐방안내소에서는 지리산의 자원과 역사를 살피고 종복원센터에 들러 반달곰도 만날수 있다.

이곳에서는 운조루, 쌍산재, 곡전재 등 고택의 정취와 효와 장수의 고장다운 인정을 느낄수 있다.

▶상사, 하사마음 - 신라흥덕왕때 승려 도선에게 이인이 모래위에 그림을 그려 뜻을 전한 곳이라 하여 사도리라 불렸던것이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구분해 상사, 하사 마을이 되었다.

▶ 화엄사 - 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으며 화엄경의 두글자를 따서 질이름을 붙였다.

매전사 매천 창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다. 창현선생은 선비로의살이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실천하신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규익지려(李圭翊之間)

향토 문화유산 제21호

이규익 정려는 효자 이규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규익은 천성이 순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평상시 집 안에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 부모님을 모셨다.
80세인 고령의 아버지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드렸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규익은 자신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드려 아버지가 3일을 더 살게 했다고 한다.
이후 잇따라 초상이 나자 이규익은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효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꿩이 묘막에 들어오기도 하고 호랑이가 옆에 와서 함께 지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이 효성을 나라에서도 알게 되어 이규익은 고종 18년(1881)에 동몽교관의 벼슬과 정려를 받았다.



오미 1.9km, 방광 10.4km

하사(下沙)마을 유래비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 흥덕왕 시대부터 있었던 마을로 추정되며,
1535년경 봉성 장씨가 문척에서,
1685년경 재령 이씨가 진주에서,
경주 이씨가 장성에서, 1740년경 전주이씨가 남원에서, 1775년경 광산 김씨가 나주에서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 되었다. 상사 마을과 같이 신라 말기 중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사둘이라 하였고,
고려 때 사등촌(沙等村)과 사도 부곡(沙圖部曲)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용두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도리라 하였 으며, 이 때 상사, 하사가 통합되었다고 한다.


오미마을

영조 52년(1776년)에 문화류씨 류이주(柳爾冑)가 풍수지리 설에 의한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烏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렸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 하여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운조루유물전시관은 조선후기부터 300여 년간 구례 오미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문화류씨가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전시된 유물은 운조루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것이다.

운조루는 조선후기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가 1776년(영조52)에 세운 99칸(현존73칸)의 가옥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운조루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 당호(號)로써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운조루유물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10:00~17:00
※ 점심시간 : 12:00~13: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임시공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