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올레길/지리산둘레길 5차

지리산둘레길5차 9구간 덕산 ~ 위태 2025.02.16

방극만 2025. 2. 16. 03:46


지리산둘레길 5차 첫(1~6구간은 4차에서 끝마침) 시작을 9구간(산청군 시천면 사리 덕산 ~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9.7km 혹은 11km)의  덕산에서 시작을 하다.


08:20~08:45 남명기념관에서 찹쌀밥과 보름나물(말린취, 무우숙주, 시금치숙주, 김, 들깨순두부국)로 아침 식사

08:56 지리산둘레길5차 9코스 덕산~위태 11km 구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에서 출발

09:13 덕산재래시장
09:19 원리교 덕산1.3km, 위태9.7km  
09:21 道花亭
09:23 천평교 덕산1.5km, 위태9.5km


09:25 천평리 金環落地
09:25~09:50 덕산 맞은편 중태마을입구 덕산1교까지 산수유길 따라 진행


10:01 시천면 중태리 99-1에서 중태재까지 송하중태길이 이어지고 또한 감나무밭이 중태재 밑 유점마을까지 이어진다.
10:19 중태안내소 : 덕산 5.7km, 위태 5.3km
10:32 중태농원 민박(휴업중)
10:52 지리산선단식원 : 덕산 6.5km, 위태 4.5km
11:00 놋점골쉼터 : 덕산 7.0km, 위태 4.0km
11:12~11:33 유점鍮店마을 : 덕산 7.7km, 위태 3.3km : 중태재에서 11km의 거리가 9.7km로 줄어 들어 버렸다
11:37 중태정자쉼터 : 덕산 7.9km, 위태 3.1km
11:57 중(위)태재ㆍ갈치재 오르는 임도사거리 : 덕산 8.8km, 위태 2.2km : 이 곳까지 이정목이 11km로 표시가 되어 있고 중(위)태재ㆍ갈치재 부터 위태마을까지는 9.7km로 표시가 되어 있다.


12:04 중(위)태재ㆍ갈치재 : 덕산 7.8km, 위태 1.9km : 하동쪽사람들은 위태재, 산청쪽사람들은 중태재, 2024.06.02 유점마을에 다니러 온 할머니는 갈치재라 들었다 한다.
중(위)태재ㆍ갈치재 부터는 11km로 표시되어 온 이정목이 9.7km로 바뀌어 위태마을까지 이어진다
1.9km 거리의 위태마을을 향해 계속 내리막길을 간다  
12:13 대나무 밭 : 덕산8.1km, 위태1.6km
12:35 중택지 방죽 : 도로지로를 따라 내려 간다 : 덕산8.5km, 위태1.2km


12:57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지리산둘레길 10, 9코스 하동호ㆍ덕산의 시ㆍ종점 :  덕산~위태 구간은 11.0km일까 9.7km일까에서 종료







산청 조식 유적 (山清 曹植 遺蹟)  :  사적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曹植 1501-1572)의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사적지이다.

남명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0세가 되어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고, 48세부터는 고향인 합천 삼가에 뇌룡정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여 그 명성이 더더욱 높아졌는데,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산동(현재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리에는 산천재(山天府)와 선생의 묘소, 신도비**, 여재실(如在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친서원(徳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 김우옹, 곽재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남명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기념관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그 뒷산에 묘소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20년대에 복원하였다.
서원 안에는 강당인 경의당(敬義堂)과 사당인 숭덕사(崇德同)가 있다.
서원 남쪽 강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추증(追贈):관리의 사후에 품계나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이품 이상 벼슬을 한 고위관료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하여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비석




산천재
덕산은 ‘조선 선비의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고 일컫는 남명 조식 선생이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던 곳이다. 
사적으로 남명의 유품과 서책, 신도비, 남명 석상 등이 있는 남명기념관을 비롯하여 산천재, 덕천서원, 용암서원, 세심정, 선조대왕이 내린 제문 국역비 등이 있다. 남명이 생전에 직접 터를 잡은 묘소도 산천재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건너편에는 남명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가 마주하고 있다. 
산천재 담장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눈 앞에 있고, 마당 가운데에는 산천재를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는 홍매가 있다. 
‘산청 3매’ 중 하나인 ‘남명매’이다.


남명매(南冥梅)

이 매화나무는 남명조식(南冥曹植1501년~1572년) 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기품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偶吟  
우연히 읊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찍다가
高聲讀帝堯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조식 남명문집 목판  曹植 南冥文集 木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조식 남명문집 목판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의 시와 문장 등을 수록한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선조 37년(1604)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원판이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새겼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도 별집*의 내용을 교정하고 보충하였다.

목판이 여러 차례 간행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자 고종 31년(1894)에 기존의 문집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으며, 고종 34년(1897)에 연보**를 수정·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목판은 185매이며, 남명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남명문집 목판은 남명 조식의 학문 세계뿐만 아니라, 지역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수록되어 있어 남명학 연구는 물론 지역사 연구에 가치있는 자료이다.

*별집(別集): 문집의 원집(原集)이 나온 뒤 따로 시문을 모아 낸 책.
**연보(年譜): 사람이 한평생 동안 지낸 일을 연대별로 간략하게 적은 기록.







2025.02.16 08:56 지리산둘레길5차 9코스 덕산~위태 11km 구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에서 출발


덕산을 지나는 덕천강은 천왕봉에서 시작된 계곡물의 물길이다.
하동군 옥종을 지나 진주 남강으로 모여 낙동강이 되고 남해에 이른다.


덕산
‘덕(德)이 있는 산(山)’이라는 이름의 덕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예전 덕산은 현재의 시천면과 삼장면을 두루 아우르는 지명이었으나, 
현재의 덕산은 시천면 소재지 일대를 통칭하는데, 
행정구역상 명칭은 덕산이 아닌 시천면 사리(絲里)이다. 
덕산은 시천의 물길과 삼장천의 물길이 합해지는 양단(兩端)의 두물머리이며, 
여기서부터는 덕천강(德川)이 된다. 
남명선생은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노래하였다.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頭流山兩端水를
녜듯고이지보니
桃花뜬맑은물에
山影조차잠겨셰라
아회야武陵어디뫼야
나는옌가하노라


덕산장 장마  조종명
아침부터 젖었다...
오정 무렵 되어서는
막걸리 집 파전 내음도
젖었다.
장옥 너머 넘실거리는
덕천강 물소리도 젖은 채 간다.
만물상회 트럭도
구곡산 중허리까지 내려온
낮은 하늘도 젖었다.
널평상에 드러누운 생선들도
오다가다 질척거리는 하루가
다 젖었다.


頭流山兩端水를
녜듯고이지보니
桃花뜬맑은물에
山影조차잠겨셰라
아회야武陵어디뫼야
나는옌가하노라

지리산의 두 갈래 흐르는 물을
옛날에 듣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복숭아꽃이 떠내려가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겨 있구나.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金環落地
하늘을 이고 선 지리산 천왕봉!
아늑하고 비옥한 이땅!
서신마을 뒷편 자그마한 산봉우리에 선녀가 앉아있다.
선녀는 다리미로 구곡산 구폭치마를 다리며
금가락지를 천평 들판에 빼어 놓았다.
원리, 사리, 천평리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상은 가락지를 닮아있다.
덕산중.고등학교 뒷편 동산은 다리미 형상이다.


중태마을
중태마을은 오래전부터 닥종이 생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지금은 닥종이 소비가 끊기면서 닥나무 대신 감나무가 들어섰다. 
중태마을은 동학혁명 때 마지막 녹두꽃이 떨어졌던 곳 가운데 하나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추격하던 관군을 맞서 이곳에서 목숨을 버렸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관군의 눈을 피해 농민군의 주검을 인근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가매장되었던 골짜기는 아직도 ‘가장골’로 불린다.


중태안내소
중태마을에 다다르면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가 있다. 
농가 피해를 줄이고 마을이 자율적으로 지리산둘레길 안내를 담당하겠다는 소망을 담아 마련했다. 
지나가는 순례자가 다리 쉼을 하고, 화장실도 들릴 수 있다. 
이곳을 오가는 순례자들이 책임여행과 공정여행을 다짐하는 기록을 스스로 남기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055-973-9850


유점(안식교)마을
중태재에서 고개길을 내려오면 유점마을이 나온다.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한 마을이다. 
예전에 유기(놋그릇)를 만들던 마을이라, 놋점골이라 불리웠다. 지금은 유기 만들던 흔적은 사라지고, 1938년부터 안식교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어 ‘안식교 마을’이라고도 한다.


시천면 중태리 유점마을 휴식처
내가 젤 예뻐
열심히 달려 온 당신
당신이 최고야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영끌
오늘도 당신은 따뜻하다
다시 둘레길에서
너는 꽃이야
당신은 뭘해도 될 사람

오늘도 수고했어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 집니다
당신은 오늘도 제일 예뻐요


중태(위태)재

위태마을에서 예전  화전민들의 고된 삶의 흔적인양 묵은 다랭이 논밭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위로 울울창창한 대나무 숲이 이어지는데, 숲의  시작지엔  작고 평온한 저수지가 산길이 시작 되고,  마을이  멀어져  간다고  알려주는 듯한 가운데  1.9km쯤 오르면 고갯마루에 닿는다. 
고개는 산청과 하동의 분수령이다. 
덕산사람들은 소금을 구하려 고개를 넘었고, 
하동사람들은 덕산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산청사람들은 중태재라 부르고 하동사람들은 위태재라 부른다.


위태마을
위태마을은 예전에 상촌으로 불렸다. 
상촌의 원래 이름은 갈티마을이었다. 
갈티라는 지명은 이곳에서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 갈치(葛峙)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 고개는 예전에 덕산장을 오가는 장꾼들이 넘나들었던 길이었고, 일제 때에는 목탄(숯)을 실어 나르기 위해 차량 통행이 가능한 신작로로 정비하였던 길이었다. 
마을이 청암면에서 옥종면으로 편입되면서, 옥종면 청룡리 상촌마을과 구분하기 위하여 위태리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회관이 있는 진등을 비롯하여 안몰, 중몰, 괴정지 등 여러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다.





창원으로 순창으로 전주로 아쉬운 작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