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의면 온당리 난동 ~ 구례읍 서시교
지리산둘레길 19구간 역방향 : 난동-> 구례안내선터->오미 19km 2024.02.18 - https://bkm2400.tistory.com/m/2476
2. 구례읍 서시교 ~ 마산면 용두리 용호정 ~ 원내 ~ 곡전재 ~ 오미리 운조루
용호정
향토문화유산(유형) 제3호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486번지
이 정각은 1910년 경술국치 후 군내 뜻있는 유림인사들이 수차 모임을 갖고 항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시계를 조직하고 1917년 오두선외 73인이 당시 1,350원을 거출하여 건립하였다.
일제의 압박에도 이곳에서는 선현의 우국 유지를 추모하고 후진을 계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주입하며 내심 국치의 한을 시 창작으로 달래며 민족혼을 길러온 정자로서 현재는 용호정시계회 주관으로 매년 10월 중에 시계회를 계최하고 있다.
이 정각은 1930년 김택균외 45인의 출연금, 1945년 노태현외 32인의 출연금으로 보수하였으며 1992년과 2001년에는 출연금과 군비지원으로 보수하였다.
용호정(龍湖亭)은 1916년 왕수환(王粹煥)․오두선(吳斗善)․윤행덕(尹行德)․마서하(馬瑞河)외 72인이 당시 구례현 관아(官衙) 건물인 고각루(鼓角樓)를 사들여 현 위치에 옮겨 세우고 용호정(龍湖亭)이라 이름 붙였다.
당시 구례(求禮) 대부분 정자(亭子)들이 시계(詩契)의 정자(亭子)가 많이 남아 있고 재건되었다. ‘용호정시계(龍湖亭詩契)’라는 칭하는 이곳은 ‘침불천시계(忱不川時契)’, ‘방호시사(方壺詩社)’, ‘반천시사(蟠川詩社’) 등과
함께 많은 시회(詩會)를 위주로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정자 규모 정면 3 칸, 측면 2 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으로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토지면 용두리 용두마을의 솔숲에 있다. 1930년, 1945년, 1992년 세 차례 보수와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옛날 부터 용대(龍臺)있어 ‘용호정(龍湖亭)’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한다.
---:: 퍼온 글::---
원내마을
지명이 대잎(죽엽) 셋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하여 죽간 호칭했다는 설과
대나무가 있으므로 섬진강 건너 오봉이 죽실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하여 죽안竹岸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간"으로 변용되어 호칭하였는데
서기 1800년 경 본군 현감이 지방 순시차 와서 서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므로
서씨는 담안에서 살아야 번성하니 원내로 칭함이 어떠냐 하며 이후부터 원내로 호칭하였다 한다.
구례군향토문화 유산9호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476번지
이 건물은 1929년 박승립이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호-곡전)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목조 건축양식의 주택으로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당시 영호남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민가형식 주택으로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ㅡ자형으로 배치되었으며
25m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을 금환金環의 개념을 도입한 점 등이
독창적이며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조 52년(1776)에 문화 류씨 류이주(柳爾胄)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鳥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렸다.
(금환락지(金環落地) : 금가락지가 떨어 진 모양)
오동은 내죽, 하죽, 박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기에 좋다하여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 둘 집어 가고 이제는 엉뚱한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
이 부분에서 호랑이 뼈다 아니다라며 종부인 할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 뼈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것이 조상의 용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손들이 바친 훈장인 바에야.
호랑이 뼈의 주인공 유이주가 바로 이곳의 문화 유씨 입향조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눌러앉았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 다음 백과사전 --
운조루에 오는 탐방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놓아둔 것으로, 대대로 내려온 '타인능해 뒤주'는 '운조루 유물전시관'에 있다.
운조루 : 사랑채 누대의 이름으로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 ‘구름[雲] 속에 새[鳥]처럼 숨어 사는 누대[樓]’란 뜻
타인능해他人能解 : ‘다른 사람이 열어도 된다’, 바꿔 말해 ‘누구나 쌀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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