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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4차 제6코스(수철~선녀탕~성심원 15.9km) 2023.03.26

방극만 2023. 3. 30. 21:06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10대 양왕(讓王)의 무덤으로 전(傳)해지는 무지개다리와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자리잡고 있는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 본 왕산(923m)과 여자의 젖가슴을 닮았다 하여 유방(두)봉이라도 하고 붓끝을 연상케 하여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文筆峰 이라고도 불리는 필봉산筆峰山(848m)을 조망할 수 있다.

<1971년 2월 9일에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다음 백과사전->

 

 

 쌍재는 큰재라고도 한다.

 

 자연동천紫煙洞天 춘래대春來臺 암각
남면선생이 제자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찾아 지막리 춘래대에서 놀다 헤어지곤 하였다는 암각이 있다는데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지막리에서 본 지리산둘레길 5코스의 쌍재~고동재 구간의 능선이 왼쪽으로는 왕등재로 이어지고 쌍재에서는 왕산과 필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지막리를 지나 신촌교에서 금서천으로 따라 내려 가 평촌마을까지 간다.

 

 평촌교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 앞 도로를 따라 해동선원 앞으로 이어진 길이 이 번에 오니 금서천을 따라 해동선원을 옆으로 비켜 평촌 마을 앞으로 가는 길로 바뀌었다.

 

 

 평촌마을 옆 금서천변 작은 동산의 정자와 냇가에 비치는 연분홍의 진달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평촌리
들말, 서재말, 제자거리, 건너말 등 네 개의 동네를 들말로 불러오다가 한자로 坪村이라 하였다.

 평촌마을 앞 이 곳 고속도로인가 하는 지하통로를 지나면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 산청공장이 우람하게 나타난다.

 

 천변을 따라 나오느라 대장마을 안동네 벽화거리 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대장마을
선인출장이라는 풍수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설에는 신라 때 어느 대장이 쉬어 간 곳이라 생긴 이름.

 대장교를 지나 고속도로 밑을 지나 경호1교로 가는 길의 벚꽃이 한창이다.

 산음 : 산청의 옛이름
퍼온 글
남강이 산청에 들어오면 경호강이 된다

이 산청의 예전 이름은 산음이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경덕왕( ? ~ 765)은 지품천현이었던 이 산청을 산음으로 바꿨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리다가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소흥시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比肩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음에 경호강이 있으니 이 남강도 산청으로 들어서면 특히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단성의 끄트머리까지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 경호강의 본 이름은 남강이다. 이 남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지리산의 동쪽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강을 만나면서 지리산의 모든 맥들은 다 끝나게 된다. 그러니 덕천지맥이나 지리태극종주, 남강태극종주, 하다못해 진양태극종주는 물론 지리동부능선까지도 모두 그 맥의 끝은 이 남강까지 인 것이다. 남강과 지리산과의 관계는 이것만 이해해도 된다.
- 졸저 전게서 159쪽

 경호1교에서는 환아정, 산청사람들이 진산으로 여기는 필봉산을 조망할 수가 있다.

경호강은
산청군의 생초면(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km)의 물길을 말한다.
강폭이 넓지만 큰 바위가 없어 강물의 흐름이 거칠지 않다고 한다.
경호강과 남강 지도를 들여다보면 경호강과 남강이 혼재되어 있는데
어디가 남강이고 어디까지를 경호강이라 하는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퍼온 글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던 것을 또다시  복원함.

 경호1교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경호강을 따라 진행을 하게 되는데 곧바로 강변식당이 나온다.

 길가에 음식을 잔득 채워 놓고 목탁소리에 찬송가로 들리는 소리에 신도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아무튼 아리송할 뿐이었다.

 올 가뭄도 가뭄이지만 아직은 이른 철인지 이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본 관광객은 이게 전부다.

 

 신라면 하나에 뜨거운 물 부워 놓고 김밥과 과일로 허접하듯한 점심이지만 표정은 맑고 밝기만 하다.

 산청 경호강 레프팅 단지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등뒤에 펼쳐진 벚꽃을 등받이 삼아 자갈밭에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굴곡이 없는 평평한 길만 걸어오면서 쉬우면서도 가끔은 무료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마음을 되잡았다.

 내리1교까지 만발한 벚꽃길이 장관을 이룬다.

 

 

 

 내리교에서 지곡사, 내리저수지, 선녀탕으로 올라갔다 경호강변 길 12.2km의 짧은 코스와 만나는 바람재로 내려오는 기다란 트레일의 15.9km를 택했다

 산청읍, 웅석봉, 경호강을 조망할 수 있는 꽃봉산은 해발이  235.8m이다.

 

 

 

 

 

 

 

 기다란 파이프라인을 왼쪽 어깨위에 매고 네발이를 운전하고 가는 할머니가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위험천만한 주행이 아슬아슬하기만 한 가운데 스타렉스가 갈길을 멈칫멈칫 하는 것만 같다.

 벚꽃 아래로 내리 저수지의 빨간색의 포토존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모퉁이를 돌아가니 사라져 버려 길을 잘못 들었나 했는데 길을 묻고 나서니 코 앞 저멀리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모르는 상황에서 포토존을 찾으러 벚나무 사이로 이동했는데 찾기는 커녕 길마져 없어져 버린 가운데 주말농장처럼 와 있는 집 주인 부부에게 물으니 자기 집 뜰로 내려와 가라며 길 안내를 해 준다.

 

 

 

 

 

 

 

 이렇게 한동작을 취하라 해도 못할 것 같은 모습이 한 캇으로 잡혔다.

 웅석봉계곡을 배경으로 내리 저수지를 만끽하며 포즈에 열중이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선녀탕에서 왼편으로 올랐던 길을 왼팔에 껴 안고 걷는  길과 마주하게 된다.

 내리 저수지 위 지곡사 아래 건물 정원의 소나무와 벚나무

 

 

 

 
智谷寺
전통사찰 제102호 : 산청군 산청읍 내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영남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대찰이었다.
통일신라 법흥왕때에 웅진스님이 창건하여 절 이름을 國泰寺라 하였다고 조선시대 후기에 지은 智谷寺龍華堂記에 전한다.
고려 광종 때에 와서는 禪宗 5대 산문의 하나로 손 꼽히는 대사찰이었다.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였고, 물래방앗간이 12개나 되었다고 한다.
추파 홍유(1718~1774) 스님이 지은 遊山蔭懸智谷寺記에 따르면 천왕문과 금강문이 있었고 회랑과 요사가 좌우로 늘어서 있어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로써 선객과 시인이 즐겨 찾던 가람이었다고 한다.
추파 홍유스님이 지곡사의 중흥을 도모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3년을 전후하여 폐사되었다가 1958년 옛 지곡사 산신각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지금까지 법등을 밝히고 있다.

 

 

 

 

 

 산청 웅석봉 선녀탕
김종직의 유두루록, 지곡사를 설명하는 글귀에 언급되어 있으며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선녀탕이라 하였다.
1987년 자연보호중앙회와 경향신문은 이 물만은 지키자. 한국의 명수 100선, 원류 계곡 44곳 중의 한곳으로 선정하였다.

 

 어느 블러그를 보니 밖에서만 보는게 아니고 저기 위로 가면 동그란 못이 있는데 우린 밖에서 에그머니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실수 아닌 실수를 하였다.

 왼 편 넘어 아래로 지곡사에서 선녀탕으로 올라왔던 길이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 아름답다.

 간간히 흙길도 있지만 다져진 임도는 포장으로 갔다가 시멘트길로 갔다 무료할 수 있는 기분을 확 바꾸어 주는 시원한 물맛이 기운이 번쩍 나게 해 준다.

 

 지리산 동쪽의 은숙봉 아래에 자리한 절로,
산청읍 내리 1127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929(경순왕3)년 창건하였으며, 창건자는 미상으로 그 후의 역사는 전하여 지지 않는다.
6.25 전쟁때에 소실되었으며, 1976년 東峰이 새로 중창하였다.

 

 

 

 

 

 십자봉등산로 입구에 차량통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무심산방의 뒷 편의 붉게 물든 진달래

 

 

 

 

 

 내리교에서 경호강을 따라 오는 12.2km의 짧은 코스로 온 길과 마주하는 바람재이다.
스탬프도 있다.

 

 

 

 

 꽤나 냄새가 난다.

 

 

 퍼온 글
성심원 과 철선(1984 - 1988년)
철선은 성심원의 세 번째 배이자 마지막 배이다.
마을 초기에는 미제 고무보트로 경호강을 건너다가 1962년부터 1972년 첫 번째 성심교 개통까지 소나무로 만든
나룻배를 이용했다. 1984년 태풍으로 첫 번째 다리가 유실 되어 급하게 철선을 구입하였다.
철선은 성심교가 유실될때마다 성심원 생활인들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였고,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화물선이였으며,
성심원 아이들의 놀이기구였다. 현재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 온 성심원 생활인들의 애환을 담고 성심원으로 옮겨져 고단했던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 산청성심원 -

옛날의 성심원에 들어가는 경호강은
고흥 소록도처럼 한번 건너면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루비콘강이 아니였던가..?
그 루비콘강을 건너던 나룻배가 철선으로 바뀌고
지금에 와서는 사랑과 애정으로 보듬은 든실한 교각으로 성심원과 손을 잡았다.
그옛날의 성심원은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등을 돌리던 한센병을 앓던 분들이 치료를 받던 곳이다.
소록도와는 달리 신부님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출발을 했다는데 정확한 내력을 알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