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12:02 쌍계사 관람 후
옥천교玉泉橋를 지나 불일폭포佛日瀑布까지 2.3km 여정의 산행을 한다.

12:04 쌍계사 종루 옆 玉泉橋에서 불일폭포를 향해 출발


금당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한문을 모르겠다


지리산 청학동이야기
Stories of Cheonghakdong in Jirisan Mt.
푸른 학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청학동은 한국인이 꿈꾸는 대표적인 이상향입니다.
지리산 청학동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전설로 내려오는 이상향에는 금강산 이화동, 관동 산도동, 함경북도 태평동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청학동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일찍부터 알려졌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미수 이인로(1152~1220)가 지리산 청학동을 가장 먼저 소개했습니다.
이곳 지리산의 어딘가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살 만한 이상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청학동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이 청학동이 온 세상에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처럼 청학동은 오랫동안 한국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전형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옛 노인이 말하기를 "이 산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겨우 사람이 통행할 수 있다.
구부리고 엎드려 몇 리를 가야 넓게 트인 땅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좋은 밭과 기름진 땅으로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을 만하다.
청학이 그 안에 서식하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등진 사람이 살던 곳인데,
무너진 담장과 집터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이인로 파한집~~
여러분들의 이상향은 어디인가요?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지금 이곳이야말로 바로 청학동이 아닐까요?
여기 쌍계사부터 불일폭포까지 이어지는 자연역사관찰로를 따라가며 한국인의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행에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20250525_120551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 된다.






최초의 청학동 노래
The First Song of Cheonghakdong
미수 이인로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을 끝내 찾지 못하고 개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쉬는 마음을 담아 글을 남겼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최초의 청학동을 노래한 시입니다.
두류산은 아득하고 너무 낮게 깔려
만 공짜기 천 봉우리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숲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신이 사는 곳 그 어디엔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두류산 : 지리산의 옛 이름
회계산 : 산혜경 등에 기록되어 예로부터 알려진 중국의 명산
삼신산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세 신산 (봉래·방장·영주)
'이끼 낀 바위의 네 글자'는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雙磎石門)'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857~?)의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글자입니다.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 두 분을 보다.















12:35 환학대喚鶴臺
환학은 '학을 부른다'라는 뜻입니다.
이곳 환학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참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입니다.
이외에도 쌍계사 경내의 진감선사탑비, 쌍계석문, 완폭대, 세이암, 삼신동 바위글씨 등 지리산과 쌍계사 주변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되었다 전해지는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최치원 (857-?)
신라시대의 학자로
호는 고운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지리산을 비롯한 각처를 유행하다 가야산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유교ㆍ불교ㆍ도교에 밝아 오늘까지 한·중·일 3국에서 존경받는 대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우리라 문학의 시조로 일컬어 진다.
◆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해산선학도(1798作), 단원 김홍도
청학동은 '청학이 깃들어 사는 곳'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 입니다.
청학은 천년을 장수한다고 전해지는 상상 속의 동물로 이상향을 상징하는 매개체입니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김일손(1464~1498)과 허목(1595~1682)의 지리산 유람기에 보이는 청학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불일암의 승려가 말하였다.
"매년 늦여름이 되면 푸른 몸에 붉은 정수리와 긴 다리를 가진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이는데 용추로 날아 내려 물을 마시고 곧 떠나갑니다.
이 암자에 사는 승려들은 여러 번 보았는데 이 새를 청학이라 합니다."
어찌하면 청학을 내 곁으로 오게 하여 거문고를 뜯으며 그와 벗할 수 있을까?
-김일손, 두류기행록
서남쪽의 석봉에는 옛날 학의 둥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에 사는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학의 날개는 검고 머리는 붉으며 다리는 자줏빛이지만, 햇빛에 비친 날개를 보면 모두 푸른색이며, 아침에는 빙빙 돌며 날아 올라 하늘 높이 사라졌다가 저녁이면 둥지로 돌아오곤 했답니다.
그러나 자금 들아 오지 않은지가 거의 백 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봉우리를 청학봉, 골짜기를 청학동이라 한다.
허목, 지리산 청학동기



두 사진 중 어느게 원숭이 머리 모양일까?



1558년 4월 19일, 청학동 불일폭포로 오르던 남명(冥) 조식(吉恼,1501-1572)은 이 바위에 새겨진 '이언경ㆍ 홍연'이라는 이름을 보고서, 실질을 무시한 채 헛된 이름을 후세에 전하려는 속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준엄한 일침을 내렸다.
남명의 이 한 마디는 지리산을 찾는 후인에게 유람 지침이 되었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史官)이 책에 기록해 두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숲 속의 바위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그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조석, 유두유록(遊頭流錄)중에서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쌍계사에서 불일평전으로 오르는 1.7㎞ 지점에 위치한 이 바위는 높이 5m, 폭 6m, 두께 10m 크기를 보입니다.
바위 위에 오르면 계곡에서 일어나는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하여 냉연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위 위에 말발굽 같은 홈이 있어 마족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1744년 진주에서 출발해 쌍계사와 불일암을 다녀간 황도익(1678~1753)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5리를 가니 냉연대가 있었다. 마적암이라고도 하는데,
바위 위에 용마의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신선이 말을 달리던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선인들의 유람풍경
Scenery of Our Ancestors on a Tour
仙人的游览风景・先人達の遊覧風景
조선시대 산수 유람은 사대부들의 취미 중 하나 였습니다.
그들은 지리산, 금강산과 같은 명승지를 유람하며 많은 시와 기행문, 그림을 남겼습니다.
조선시대 여행 기록에서 '남여, '견여'라는 단어를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형태의 가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남여는 산을 오를 때 쓰이던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산에서 가마를 메고 다니거나 길을 안내하며 유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은 대부분 승려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조선 중기 조위한(1567~1649)의 『유두류산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정오에 남여를 준비해서 붙일암에 올라가려 하였다. 다섯사람이 각자 남여를 타고 법당 뒤로 곧장 올라갔다.
정상이 매우 높아 부여잡고 오를 수가 없을 만큼 가팔랐다.
남여를 짊어진 승려의 헐떡이는 숨소리는 쇠를 단련하는 듯 거칠었고 등에는 진땀이 흥건하였다.
다섯 걸음 열걸음 마다 어깨를 바꾸고 위치를 옮겼다.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오른쪽으로 기울기도하고 왼쪽으로 기우뚱거리기도 하였다.
남여를 타고 있는 괴로움도 남여를 멘 고통 못지 않았다.
한 치 나아가고 한 자 물러나면서, 고생스럽게 올라갔다.








청학동이 있을까?
쌍계사의 동쪽 골짜기를 따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길을 떠났다.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를 기어오르고 하면서 몇 리를 가자, 꽤 넓은 평평하여 농사 짓고 살 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우리들은 이곳에 을 수 있었는데, 이인로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어쩌면 미수가 여기까지 왔었는데 느슨한 마음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청학동이란 정말 없는데 세상에서 그 소문만 계속 전해오는 것은 아닐까?
-김일손(1464-1498)
유람록의 기록처럼 이곳 불일평전은 인근의 불일암, 불일폭포와 함께 한국인의 이상향인 청학동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햇빛이 잘 들고 충분한 물이 흐르며 토질이 좋아서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옛 문헌 속 청학동 |
Cheonghakdong in Old Works of Literature 古文献中的青鹤洞・古い文献の中の靑鶴洞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곧 청학동이다....
이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수 없었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 틈에 깃들어 살면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조식 유두류록(1558作)
예로부터 만수동과 청학동이 있다고 전해오는데, 만수동은 자금의 구품대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이다.
근래에 조금씩 길이 뚫려 사람이 오간다.
-이중환 택리지(1751作)
노인에게 토지·인물·생업·풍속 등을 차례로 물어보니, "이곳의 본래 이름은 학동인데 '불지'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광무연간(1897-1906) 토지를 추량 할 때에 서기가 '이곳은 산세가 학의 형세가 아닌 곳이 없다고 말하고서 '학동'으로 이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청암면 학동을 청학동이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종엽, 유두류록(1909作)
세상에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고 전한다.
십승지 중 하나이고, 만 명이 먹고 살 수 있으며, 삼재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높은 꼭대기나 깊은 골짜기까지 샅샅이 찾아보아, 혹자는 세석평이나 덕평 등지를 청학동이라 한다.
그러나 거의 알 수가 없다.
천년 전 청학이 이곳에 날아와 청학루를 지었으니, 청학루가 있는 이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김택술, 두류산유록(1934作)

마음으로 그려낸 살기좋은 곳 이상향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향을 꿈꿉니다.
이상향이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려낸 가장 살기 좋은 곳입니다. 서양의 이상향으로 영국의 토머스 보어가 쓴 소설의 이름에서 유래한 유토피아(Utopia)가 있습니다. 그 뜻은 "어느 곳에도 없는 좋은 장소" 입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란티스가 있는데 기원전 1500년 경 화산폭발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의 이상향으로 이스라엘의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이상향은 무릉도원(武陵桃源)입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무릉에 있는 복숭아 꽃이 활짝 핀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천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이상향은 청학동이고, 이외에 우복동, 이어도, 태평동, 율도국 등이 있습니다.
전국에 청학동으로 여긴 장소나 지명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의 불일폭포-불일암, 세석평전, 덕평 등을 청학동이라고 여러 옛 문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리병 속 별천지 |
A Wonderland Inside a Gourd Bottle 葫芦瓶的世外天地・瓢箪瓶の中の別天地
소선풍기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저서 지봉유설에는 어떤 승려가 지리산에서 고운 최치원의 시 열여섯 수가 적힌 시절을 발견했고, 그 중에서 여덟 수를 구례한감이 얻어서 이수광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東國花開洞
동쪽 나라 화개동에는
靈中別有天
호리병 속의 별천지가 있다
仙人推玉枕
선인이 옥베개 밀치고 일어나니
身世款天年
세상이 천년을 훌쩍 지났네
이수광은 이 필적이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일 뿐만 아니라, 시도 기이하고 예스러워 그의 작품이 분명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불일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부속암자입니다.
신라 말에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때 이곳에서 수도한 국사 지눌의 시호인 불일보조를 따 불일암이라 이름지어졌습니다.
그 뒤 폐사된 것을 1911년 용은스님이 중건하였는데,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8년에 고산스님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일암은 쌍계사와 함께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한 선비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명승지이자 청학동을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암자 인근에 불일폭포와 완폭대가 있고,
좌우로 청학봉과 백학봉이 있습니다.
청학동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는 이곳이 신선 세계, 또는 이상향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줍니다.
등구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16일이 지났다.
지나는 곳마다 온갖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고 많은 골짜기물이 다투어 흘러 기뻐하고 놀란 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뿐이었다. 또 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인로가 찾던 곳이 여기가 아닐까 의심했다.
-김일손 (1464-1498), 두류기행록




'완폭'이란 폭포를 바라보며 감상한다는 뜻입니다. 불일폭포를 바라보기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이 바위는 조선시대 유람객들이 폭포를 감상하며 쉬던 명소였습니다.
'玩瀑臺' 글자는 고운 최치원이 쓴 글자라고 전해집니다.
수많은 고문헌에서 언급되었지만 잊혀졌던 이 바위는 2018년 4월 국립공원공단 직원(조봉근)의 끈질긴 노력으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완폭대 소나무 밑에 이르러 벌려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1백 척(尺)이나 되는 낭떨어지 위에 있고, 동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 라고 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가 있다. 완폭대 아래 실같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무를 부여잡고 곧장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신동 석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몸이 날렵하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성여신, 방장선유일기
불일폭포



























불일폭포
Bumil Falls 佛日瀑布
이 폭포는 보조국사 지눌이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불임암 인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불일폭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해발고도 530m에 위치한 이 폭포의 높이는 약 60m이며, 물이 모이는 상류 면적은 약 1.8km2입니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며, 지리산국립공원 내에서 길이가 긴 폭포 중 하나입니다. 유몽인(1559~1623)은 남원부사로 있던 1611년 4월 7일 이곳을 유량한 후, 불일폭포의 경관과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의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쯤 되었다. 우리나라의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 듯하다....
하늘의 띠가 아래로 드리운 듯한 폭포가 쏟아져 온 골짜기가 우레 치는 듯 요란하고 붉은 빛깔을 띤 안개와 흰 눈같이 하얀 물방울이 골짜기 안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여, 정신이 상쾌해졌다.
이 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유몽인, 유두류산록

그림속의 불일암과 불일폭포
왼쪽의 그림은 지리산 자락에 살며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는 현석 이호신 화백이 2018년에 그린 산수화입니다.
불일평전, 불일암, 완폭대, 학연, 용추, 그리고 장엄한 불일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리산 깊은 곳에서부터 모인 물이 청학봉과 백학봉 협곡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정신을 상쾌하게 합니다.
쌍계사로 하산

천남성 : 보호, 비밀, 현혹, 전화위복

붓꽃 : 기별, 존경, 신비한 사람







12:04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옥천교玉泉橋에서 시작하여 14:50 쌍계사로 다시 돌아 와 불일폭포 트레일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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