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순창군

도왕~입석~강경마을입구(예향천리 마실길 순창) 2024.12.29

방극만 2024. 12. 30. 20:53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도왕마을~입석마을~강경마을입구 : 예향천리 마실길 순창)



12:36 도왕마을 삼거리 : 도왕마을 0.1km, 입석마을1.9km, 강경마을2.6km
12:38~13:32 도왕마을 투어 점심    
13:26 도왕마을 삼거리에서 입석마을로
13:42 순창 석산 마애여래좌상입구 : 도왕마을0.4km, 입석마을1.5km
14:05 입석(선돌)마을 : 도왕마을 1.8km, 내월마을 1.4km    
14:20 삼거리 : 장군목길 마실길 굴등 1.4km, 석산길 입석 1.0km, 주차장 1.3km
14:30 밀양박씨 고직당파 효자정려각
14:47 구미교 : 장군목길에서 강경길과 장군목길과 분리  
15:01 강경마을ㆍ섬진강 마실휴양 숙박시설단지 분기점에서 종료





은적골 강경마을길의 세목터2.5km와 도왕마을 분기점에서 유턴하여
출발지인 강경마을에서 예향천리 마실길(순창)제4코스 : 도왕마을 0.52km, 강경마을 2.3km 지점에서 도왕마을로 향하다.




도왕마을 투어 및 점심





도왕마을 투어 후 입석마을로


13:42 순창 석산 마애여래좌상입구 : 도왕마을0.4km, 입석마을1.5km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석산리 마애여래좌상은 앉아 있는 모습의 부처를 약 3m 높이의 평평한 바위 면에 얕게 새긴 것이다.
마애란 '암벽에 새겼다'는 뜻이고,
여래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 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좌상은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19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는 불암사라는 사찰의 옛터에 남아 있으며,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새겨져 있다.
머리 주변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나타내는 광배가 있고,
입술 주위에 붉은색으로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눈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고,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의 오른쪽 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불상이 새겨진 암벽 주위에서 석축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된다.
이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석마을




석산리 입석마을 정류장에서 섬진강변 장군목길 삼거리로 향하다.





섬진강변 장군목길과 입석ㆍ도왕마을로 향하는 석산길의 삼거리


마을입구 표지석 :
석산리 마애여래좌상
석산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270cm, 폭180cm 내외 크기로서, 앉아 있는 불상坐像으로 바위 면에 돋을새김 하였다.
두부頭部는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큰 편인데 정사각형에 가깝고,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 않으나 가늘게 뜨고 있는 듯하다.
큼직한 코, 두툼한 입술 등이 얕게 부조浮彫되어 부드러운 인상을 느낄 수 있다.
손의 모습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듯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표현하였으며,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새겼다.
특히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상호표현, 평행 밀집형의 옷주름 표현 등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이 위치한 이 곳은 백제 의자왕641~660때 궁선대사가 세운 불암사터로 전해지고 있다.



위의 기념비에 기록된 연혁을 간단히 살펴보자(혹 해석이 잘못 되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입석마을 입석은 남평현감 겸 나주진관을 역임한 세종대왕자분의 8세손(휘 상립 호 송암/이름은 미쳐 확인하지 못했다)과 밀양박씨 박봉형(?) 두 분이 영조 2년 1727년에 불암사 종소리만이 산천 적막을 깨우는 고요한 마을에 정착하였다.
정착을 기념하여 이씨는 정자나무(?)를 박씨는 팽나무를 심은 후 이를 기념하여 입석을 세웠다.

그 후 1984년 도로공사로 인해 통수천변에서 이곳 삼거리로 이건하여 다.
후손들은 앞으로도 입석을 마을수호신으로 모시기를 바란다.
이는 마을의 애환과 역사를 간직한 입석을 세운 선조의 뜻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입석은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벗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세운 듯하다.

또한 기념비에는 석산리 마애여래좌상이 속했던 사찰에 대한 폐사의 단초를 기록하고 있다.
불암사가 폐사되자 마지막 승려 도주道州스님이 동치8년(서기1869년 3월 25일) 사찰 임야를 조진상씨에게 팔고 떠나면서 입석을 부여잡고 "나는 사찰을 떠나면 이슬과 같이 사라지지만 너는 불암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 고을을지키리라"하면서 울었다는 내용이 있다(사실 여부는 논외로 한다).

위의 내용으로는 입암이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멀지않은 곳의 고인돌이 유존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세워졌던 입석을 옮겨와 두 그루 나무와 함께 마을 당산목과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 듯 보인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근거는 없다.  (다음 카페 옛님의 숨결에서 퍼온 글)





섬진강 구미교로 이어지는 장군목길에서 분기되는 강경길을 따라 출발지인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43, 강경마을ㆍ섬진강 마실휴양 숙박시설단지 분기점 주차장으로 향하다.


밀양 박씨 효자 정려각 密陽朴氏 孝子 旌閭閣

Stele of for a devoted sons the Mil-yang Park Clan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372번지

이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건축물로 박태구(朴泰龜), 박만동(朴萬東), 박태현(朴泰鉉) 등 밀양 박씨 문중 효자 세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3년(1865년)에 정려를 받아 처음 세워졌다.

박태구는 매일 물고기를 낚아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나중에 부모상을 당하자 여묘 (廬墓/ 무덤 근처에 오두막집을 지어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하였다. 박태현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상을 당해 슬퍼하고 서러워하였다.
제삿날에는 늘 반드시 새 옷을 지어 여묘살이 하던 곳에서 불에 태워 드렸다.
박만동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고, 아버지 병환에 쾌유를 비니 산에서 영지(靈 芝)버섯을 구하고, 물에서 잉어를 낚았다고 한다.
어머니 병환에는 손가락을 베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3일간 연장시켰다.

정려각 안에는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孝子贈童蒙教官朝奉大夫朴泰龜之間(高宗三年乙丑八月命旌)
[유명조선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박태구지려 (고종 3년 을축 1865년 8월 명정)]

有明朝鮮孝子贈童蒙教官朝奉大夫朴萬東之間(高宗三年乙丑八月命旌) [유명 조선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박만동 지려 (고종 3년 을축 1865년 8월 명정)]

有明朝鮮孝子贈童蒙教官朝奉大夫朴泰鉉之間(高宗三年乙丑八月命旌)
[유명 조선 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박태현 지려 (고종 3년 을축 1865년 8월 명정)]

1901년에 대홍수와 1950년 6.25 한국전쟁 등으로 효행을 기록한 문적들이 유실되고, 정려각도 낡아서 중수하였다.
이후 다시 노후되어 2020년에 밀양박씨 고직당파 종중에서 전면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관리하고 있다.



장군목길 따라




강경길 따라 거닐다


예향천리 마실길(순창)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43, 강경마을ㆍ섬진강 마실휴양 숙박시설단지 분기점에서 트레일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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