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경상남도

해운대 해수욕장 ~ 동백섬 해안산책로 2024.10.25

방극만 2024. 11. 5. 14:35



13:45~ 해운대 미포 블루라인광장
13:56 ~ 14:22 그린레일웨이 시ㆍ종점인 미포정류장 인근 극동돼지국밥 점심
14:26 ~ 15:51 해운대해수욕장
15:53 ~ 16:28 동백섬 해안산책로 트레일
16:11 해운대 석각
16:14 동백섬등대
16:17 누리마루APEC하우스
17:02 동백섬정류장

동백섬정류장에서 송정해수욕장 구덕포까지 택시비 8,800 카드 사용


  부산식전통토렴국밥 : 건더기가 든 뚝배기에 펄펄 끓는 육수를 부있다 내렸다 하며 딱 먹기 좋은 온도를 맞추고 부드럽게 풀린 밥알에 육수가 골고루 배인다.


해운대 온천의 유래 Origin of Haeundae Hot Springs/海云台温泉由来/海雲台温泉の由来

  신라시대에 해운대 구남벌의 한 웅덩이에서 온천물이 발견된 뒤부터 해운대일대의 온천을 구남 온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귀족들이 행차가 끊이지 않고 특히, 51대 진성여왕이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아 해운대에서 온천을 하고 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해운대 온천은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에 의해 근대온천으로 개발되었는데, 1900년 무렵에는 청사포 갯마들의 나환자들이 몰려와 몰래 온천욕을 하여 나병을 치료하였다고도 한다.
  광복 후에는 이 일대가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교통이 발달함과 동시에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65년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되고 1982년 온천보호지구로 지정되면서, 지금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해운대에 올라
이인늘
구름속에 치솟은 듯
아스라이 대는 높고
굽어 보이는 동녁 바다
티없이 맑고 맑다
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르른데
훨훨 나는 갈매기
등너머 타는 노을


해운대 엘레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내가 운다

울던 물새도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흐르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는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게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손인호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매여 불러봐도 대답없는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매여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도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황선우 작사ㆍ작곡
조용필 노래




        동백섬



해운대 석각 : Carved stone of haeundae
海雲台 石刻·海云台 石刻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4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710-1(동백섬)
  이 석각은 신라 말의 시인이자 학자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최치원이 어지러운 정국을 떠나 가야산으로 입산하러 갈 때, 이곳을 지나가다 자연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대(臺)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거닐다가 암석에다 해운대란 세 글자를 음각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석각에 새겨진 해운대란 각자(刻字)가 최치원의 자필이라고 할 만한 확실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의 문신인 정포(鄭誦, 1309~1345)의 시 가운데 '대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 라고 하는 구절을 볼 때, 이미 당시부터 동백섬에 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동백섬 일주도로 중 APEC 기념 전망대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과 파도에 씻겨 세 글자 중 운(雲)자가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


해운대 석각 Carved stone of haeundae
海雲台 石刻·海云台 石刻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4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710-1(동백섬)
  이 석각은 신라 말의 시인이자 학자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최치원이 어지러운 정국을 떠나 가야산으로 입산하러 갈 때, 이곳을 지나가다 자연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대(臺)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거닐다가 암석에다 해운대란 세 글자를 음각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석각에 새겨진 해운대란 각자(刻字)가 최치원의 자필이라고 할 만한 확실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의 문신인 정포(鄭誦, 1309~1345)의 시 가운데 '대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 라고 하는 구절을 볼 때, 이미 당시부터 동백섬에 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동백섬 일주도로 중 APEC 기념 전망대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과 파도에 씻겨 세 글자 중 운(雲)자가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