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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4차 20구간 역방향 : 산동 ~> 방광 13km 2024.01.21

방극만 2024. 1. 22. 15:34



08:05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산동면사무소에서 광의면 방광리 참새미마을까지 13km 여정의 지리산둘레길 20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
08:25 효동마을
08:29 탑동마을
08:42 썰렁한 문화예술촌
08:49 구례수목원 입구
09:13~09:27 구례수목원~지리산정원 5.6km 임도의 첫 번째 커브의 정자
09:57 구리재  

(10:00 혼자서 지초봉으로
10:10 지초봉길의 구례 짚와이어 와 모노레일(상)
10:19~10:32 해발 601m의 지초봉
10:37 구리재로 복귀)

10:37~10:40 구리재에 복귀해서  떡살ㆍ오뎅ㆍ라면 이른 점심 식사 후 출발
: 식사를 한 참을 한 것 같은데 너무 짧은 시간이다.

(12:06 수목원~지리산정원 임도를 따라가다 구리재, 지리산 정원, 난동마을 삼거리의 칡대밭골에서 둘레길을 벗어나 지리산 정원으로
12:18~12:46 지리산 정원)

12:57 난동마을 방광 4.4km, 오미마을 16.7km 갈림길의 삼거리 에서 둘레길로 합류
13:09 예술의 마을
13:22 남악사지
13:35 대전리 석불 입상
13:54 수로와 함께 비포장길이 보임
14:15 수로 시작점인 비닐하우스 집
14:28~14:42 광의면 방광리 참새미마을에서 13km의 여정 지리산둘레길 20구간을 마치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에 위치한 전북, 전남, 경남의 5개 시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120여 개 마을을 잇는 총 274㎞, 800리의 장거리 도보길 이다.

이중 지리산 둘레길 20코스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방광마을과 구례군 산동면 면사무소를 잇는 13km의 지리산둘레길.
방광-산동 구간은 지리산국립공원을 이웃하며 걷는 임도와 마을을 잇는 옛길로 구성된다.
광의면 방광리 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천은사도 여유가 되면 둘러볼 수 있다.
난동마을을 지나 당동 화가마을을 돌아가다 보면 조선시대 남악사터와 대전리 석불입상을 볼 수 있다.
지초봉 일대는 구례 수목원과 국내최대의 생태숲이 조성중이어서 다양한 숲자원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 와서 불로장생 약을 찾았다는 지초봉 옆의 구리재에 올라서면 구례분지의 넓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광마을이 자랑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소원바위’가 있다.


구례군 산동면에 위치한 구례수목원은 2020년 3월 1일에 전라남도 공립수목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54ha의 산림면적 곳곳에 봄향기원, 겨울정원, 그늘정원, 외국화목원, 기후변화테마원, 자생식물원, 계류생태원 등 13개의 주제정원과 방문자 안내소, 전시온실 및 종자학습관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자생나무들과 꽃들로 식재되어 이색적인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지리산권과 남부내륙의 식물 유전자원을 수집 · 보전하고 있으며, 지리산 야생화와 어우러진 산책길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체험은 숲해설가 및 유아숲지도사의 지도하에 숲속 자연물을 이용한 미꾸라지 잡기, 매미 잡기, 앙금 플라워 만들기 및 솔방울 열매 체험 등 관내외 어린이들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유아숲 체험이 있다.
걷고 싶은 길을 조성하고, 스토리텔링 특화길을 조성하여 방문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휴양서비스를 제공하며 수목원과 함께 식물 판매장과 카페를 개장하여 서비스 질을 한층 더 높혀 만족도가 높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갖가지 꽃을 감상하며 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는 구례수목원은 숲속체험과 휴양를 결합한 힐링체험형 수목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리재(해발 487m).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을 잇는 고갯마루로 둘레길
20코스의 가장 힘든 고갯마루로 지초봉과 간미봉을 연결하는 사거리 이기도 하다.
구만저수지에서 출발해서 까치절산과 지초봉을 넘고 납재와 간미봉을 오르면 그 마지막 정점에 시암재에 도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곳 구리재벅수는 둘레길 벅수와 간미봉능선 등산로 벅수가 공존하고 있다.
간미봉능선 산행 이정표 : 지초봉 0.72㎞, 납재삼거리 1㎞, 간미봉 1.5㎞
간미봉에서 능선을 계속해서 이어 걸으면 시암재에 도착을 하고 공단의 눈을 피해 종석대까지도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 와서 불로장생 약을 찾았다는 지초봉 옆의 구리재



지초봉 : 해발 601m 지리산둘레길 20구간 구리재 2024.01.24 - https://bkm2400.tistory.com/m/2450

지초봉 : 해발 601m 지리산둘레길 20구간 구리재 2024.01.24

멀리 밤재를 지나 온 남원~구례간 산업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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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원 : 둘레길 20코스 역방향 구리재~난동마을 2024.01.21 - https://bkm2400.tistory.com/m/2451

지리산 정원 : 둘레길 20코스 역방향 구리재~난동마을 2024.01.21

지리산둘레길 20구간 산동~방광마을 13km 여정 중에 구리재에서 해발 601m의 지초봉에 올라 산동면과 구례읍 방향의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구름이 걸쳐 지나가는 산 등성이를 구경하고 다시 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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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동마을에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등 두 개의 당산이 있다. 조탑 옆에 서 있는 당산나무가 할아버지 당산나무라면, 난동마을의 할머니 당산나무는 마을 안쪽에 자리를 잡고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 당산제를 지내는데, 할아버지 나무가 있는 윗 당산과 할머니 나무가 있는 아랫 당산 두 곳에서 당산제를 거행한다. 지리산 생태숲이 있는 지초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당동마을처럼 산 중턱에 자리해 들판 내려보는 전망이 좋다.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그 길 끝에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묵은 소나무 몇 그루가 어울려 자라고 있다. 솔숲 가운데는 제당을 꾸려놨는데, 정자도 있어 쉬어가기 좋다.


당동마을 (구례예술인마을)
지리산 남악 사당이 이 마을 북쪽에 있었다고 해서 당동 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는 구례 예술인마을이 있는데 화가, 도예가, 건축가 등 예술인 약 30호가 모인 마을이다.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으며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카페, 주차장 등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8만 5950㎡의 용지에 창작과 주거 기능을 갖춘 작업실들은 조각과 회화, 사진 등 장르의 성격에 맞게 화가들이 꾸밀 수 있고 별도의 전시실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구례의 섬진강과 지리산, 풍부한 문화자원들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겨울에도 비교적 춥지 않아 예술가들에게는 작업하기에 매력적인 장소인데다가 완주순천간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까지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과 화엄사, 천은사 등의 문화유적과 연계되는 문화관광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남악사지
국가의 주도 아래 지리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사당이 있던 터이다.
남악사지가 있는 '당동'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원래 남악사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당몰'이라 하였으며 남악사지는 '궁안' 또는 '궁터'라고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 지리산 신사가 남원부의 남쪽으로 약 25km(64리) 정도 떨어져 있는 소아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리산 신사가 남악사로 추정된다.
1991년 10월부터 1992년 2월까지 4개월 간 남악사지 지표조사 결과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건물터와 조선 초기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와 전塼을 비롯해 남악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조선 후기의 백자류 및 제기祭器 등이 있다.
1752년에 발간 된 남원읍지인 "용성지"의 기록을 보면 남악사에는 국왕을 대신하여 전라도 관찰사가 해마다 봄과 가을 그리고 설날 아침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혹 재앙이 있으면 따로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순종 2년(1908) 나라의 산천제를 폐기하고 국제신사國際神祠의 기능을 정지하면서 남악사도 폐사되었다.


求禮 大田里 石佛 立像 : 전남 유형문화재 제 186호
대전리 석불 입상은 광명으로 인의(仁義)에 따라 중생을 다스린다는 비로자나불상이다.
높이는 1.9m이며 눈, 코, 입 등이 훼손되어 얼굴의 형태를 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양쪽 볼이 풍만하고 기교가 없으며 예스럽고 소박한 미소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머리카락은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나발)이지만 그렇지 않은 형태도 일부 있다.
불상의 정수리에 난 혹처럼 생긴 육계는 크고 넓은 편이며 옷(법의)은 두 어깨에 걸친 형태인 통견이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자리인 대좌에는 거칠게 다듬어진 타원형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제작 연대는 나발, 육계, 법의의 옷 주름 등으로 보아 고려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전리 석불입상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산46

일명 ‘미륵골’이라 불리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상대 마을의 북쪽 저수지 끝부분에 서 있는 석불이다.
얼굴은 비바람에 의하여 많이 닳아 희미하지만 타원형의 얼굴에 나발과 눈썹 사이가 좁아 이마가 협소하고 입가에 살짝 패인 볼우물이 있어 통통해 보이고 은은한 미소가 온화하다. 손 모양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쥔 형태인데 다소 시대가 떨어지면서 변형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불 바로 옆에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높이 80㎝의 공양상이 있고 그 주변에는 2개의 돌기둥이 남아 있다. 보통의 비로자나불은 앉아 있으나 이 석불은 서 있는 예로 매우 특이하다.
1992년 조사 과정에서 주변에 건물의 주초석과 기와 조각, 벽돌 조각 등이 발견되어 아마도 옛날에 절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한다.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불상의 손 모양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9.2km, 차량 이동 15분 거리에 화엄사가 있다.


방광마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남양 홍씨가 피신해 거주한 후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서 판관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
즉 판관이 팡괭이로 변했다가 다시 방광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다른 전설도 있다.
지리산 우번대라는 암자에 노승과 사미스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천은사 뒤 계곡을 오르다가 사미스님이 남의 밭에서 조 세 알을 손에 쥔 것을 본 노승이 '너는 주인이 주지 않은 조를 가졌으니
주인집에서 3년간 일을 해 빚을 갚으라"고 말하면서 사미스님을 소로 변신시켰다.

그 날 밭주인이 소를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소가 여물 대신 밥만 먹었고,
쇠똥이 땅에 떨어지면 빛을 내면서 곡식이 잘 자랐다 해서 방광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방광마을이 자랑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소원바위’가 있다.
참새미마을 계곡에 반해 놀러왔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의 간절한 소망에 감복하여 노고단 정상에서 가져다주었다는 바위다.
아낙네가 이 바위를 품고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나머지 둘은 소원바위에 빌어 아들을 얻은 아낙네가 감사의 표시로 심었다는 100년 묵은 감나무와 마을 중앙에 있는 540년 묵은  당산나무라고 한다.
방광마을은 들 가운데 형성된 큰 마을로 마을 안에 정미소가 있다.
마을 복판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골목길을 따라 가며 만나는 돌담도 볼거리다.
-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


천은사는 구례읍 북쪽 9km 지점, 지리산 일주 도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흥덕왕 3년 (828년)에 덕운조사와 인도의 승려 ‘스루’가 터를 닦고 지은 절로서 화천양사라 하여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광해군 2년(1610년)에 혜정 선사가 다시 지었으나
숙종 2년(1676년)에 불에 타버려
그 이듬해 절을 지었다가
영조 49년(1773)에 화재를 당해,
영조 51년 (1775년)에 혜암 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천은사의 본래 이름은 828년 인도 승려와 덕운 조사가 창건할 당시 경내에 이슬처럼 맑은 차가운 샘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이 맑아진다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후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다른 분들의 글에서 뒤적뒤적 모아 보았는데 설명에 아쉬움은 늘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