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초등/대강기타

2010.6.13 과 6.22

방극만 2010. 6. 24. 15:19

 

민간인 90여명 학살당한 남원 강석마을 가보니

오늘 6·25전쟁 60주년…"참말 무서워, 다신 전쟁 없어야"

한국전쟁 60주년을 하루 앞 둔 24일,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 이장 장동수씨가 전쟁 당시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 포도밭. 1950년 6.25 당시 이 포도밭은 논이었고 이 곳에서 국군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나눴다고 한다...

"그러게 벌써 60년이나 지나 부렸네. 세월이 흐르니까 이제 기억도 희미해져."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 이장 장동수씨(72)는 열두 살 때의 가을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다.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 같았던 마을의 기억.

아버지뻘인 당시 20~30대 동네사람 수십여명이 그 해 가을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강석마을에는 80대 이상 남자가 거의 없다.

남원에서도 한참 구석진 오지.

논밭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아오던 사람들의 일상을 깨뜨린 것은 전쟁이었다.

피해자는 죄 없는 양민, 가해자는 국군이었다.

1950년 11월 17일 새벽 비극은 시작됐다.

며칠 전부터 인접한 송내마을 사람들이 우수수 강석마을로 피난을 왔다.

송내마을은 지리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빨치산들이 종종 들르던 곳.

국군이 입성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혹여 변을 당할까 무서워 강석마을로 몸을 피한 것이다.

이 피난이 민간인 학살의 발단이 됐다.

송내마을에 입성한 국군은 텅 빈 가옥만을 목격했고 잠시 빨치산과 교전을 벌인 뒤 피란지인 강석마을로 들어왔다.

강석마을 사람들은 그때까지 참상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죽인다고 했으면 도망이라도 갔겠지.

어른들은 다들 국군이 마을 와서 조사하고 연설이나 할 줄 알았어."

이날 부친을 잃은 최금순씨(69)는 당시 아홉 살이었다.

최씨의 어머니는 먼 산에서 총소리가 나도 아랑곳 않고 김장 준비를 했다.

"모다 죄 없으니께 설마 죽이겄어." 최씨는 어머니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틀렸다.

마을에 들어 온 국군은 동네 한 가운데 논으로 마을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20~30대 젊은 사람과 그 외의 연령대를 나눠 앉혔다.

그리고 지금은 저수지가 된 산 중턱 논으로 젊은이들을 끌고 갔다.

얼마 뒤 총성이 쏟아졌다.

그렇게 최씨의 아버지는 서른 한 살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십여 년 뒤 마을을 떠났다.

이웃 수십여명이 학살당하고 남편이 죽은 지긋지긋한 마을에서 살기 싫었던 것이다.

마을 저수지 옆 야산에는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묘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학살의 와중에 살아 온 사람도 있었다.

'금산양반', '밤실양반' 등 3명은 총살 현장에서 죽은 척 해 목숨을 부지했고,

이들의 입을 통해 당시 학살의 참상이 마을사람들에게 전해졌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일본도로 참수를 당한 이들도 있었다.

마을 이장, 부녀회장, 청년회장 등 말께나 한다는 사람 20여명은 집 안에서 목이 잘려 숨졌다.

"우리 마을은 오지이다 보니까 수복이 늦었어.

그래서 달아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이 빨치산이 됐고, 우리 옆 마을이 가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됐지.

그래도 우리 마을은 무탈했는데 옆 마을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피난 온 뒤 국군이 구분이 안 되니까 다 죽인 거지.

이유라도 알고 죽었으면 원이라도 덜할 텐데 젊은 사람은 그냥 다 죽였어."

당시 큰형이 총살당한 뒤 학살당한 마을사람들의 명부를 정리해 간직해 온 김덕초씨(74)는

그날 벌어진 참상의 이유를 이렇게 짧게 요약했다.

"참말로 무섭지 전쟁은. 만약에 또 전쟁나면 어쩔 것이여.

다 불탄 집들을 어렵게 다시 지어놓고 사는데 다시는 그런 일 없어야지. 없어야지 말고."

긴 탄식을 털어놓은 뒤 이장 장동수씨는 마을 안내방송을 하러 마을회관으로 갔다.

잠시 뒤 장씨의 음성이 평화롭게 마을에 울려 퍼졌다.

"아, 아, 이장입니다. 마을주민들 안녕하십니까. 트랙터 필요한 분은 바로 이장한테 신청하십시오.

농협에서 싸게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까지 신청해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강석마을 논에는 모내기를 마친 벼가 파릇하게 자라고 있었다.

참새들은 짹짹 이며 마을을 누볐다. 땡볕 아래에도 주민들은 논밭으로 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석마을에서의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숨겨져 왔었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이 마을의 참상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로 밝혀졌다.

2008년 10월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11월 17일 국군 제11사단 소속 부대 또는 전차공격대대가

남원 대강면 강석마을에 공비토벌작전을 이유로 민간인 90여명을 칼로 목을 베어 살해하거나 집단 총살했다고 진실규명을 했다.

희생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한 '부상 후 사망자'는 5명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떠나려는 기자에게 이장 장동수씨가 한 마디 던졌다.

"위령비라도 지어볼라고 지원 좀 받으려는데 그게 잘 안 되야."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진실규명 당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위령시설 설치 등 이 사건 희생자를 위령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60년이 지난 2010.6.13 아침(어제는 순창에서 장인 팔순잔치 : 녹원식당-동네 어르신과 게이트볼 친구들 저녁 대접하고

                                               잠자리가 모자라 송내 어머님댁에 와 자고 그이튼 날 이른 아침 산책길) 

         아내와 산책길에 송내 뒷산 중턱 그럭재 우리 밭(지금은 산흙이 내려와 흔적 찾기가 힘듬) 위에서 바라본 강석굴

         60년전 기억일라나 날씨가 흐리고 찌쁘덩하여 밝은 사진을 찍지 못함

         그런데 오늘 25일 전북일보 1면에 그것도 톱기사로 아픈 기억을 돼새겨 내 오늘의 강석굴을 다시 올려 본다 

2010.6.13 아침 송내 뒷산에서 바라본 강석굴 

보령시 대천에서 양태근 장인 문상후 영주.일순.강수와 같이 차타고 돌아오는데 우리차 뒤 자전거 메달아 놓은 것을 물어보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