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익산시

왕궁리 유적지 2023.12.05

방극만 2023. 12. 6. 11:05




  익산 왕궁리 유적  益山  王宮里 遺蹟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궁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삼국 시대 도성을 이해하는데에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1890년부터 시작한 발굴 조사에서 궁궐 담장, 정전, 정원, 후원, 화장실, 공방 등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궁성은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길의는 동서로 약 240m, 남북으로 약 490m이다.
  담장의 폭은 3m가량이며, 담장 양쪽으로는 1m  폭으로 편평한 돌이 깔려 있어 보도 시설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궁성 안은 동서 방향으로 축대를 쌓아 공간을 남쪽인 전반부와 북쪽인 후반부로 나누었다.
  전반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단이 지도록 4곳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고,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했던 정전건물, 사용했던 기와를 쌓아 건물을 올린 와적기단 건물, 1동 2실 구조 건물 등을 세웠다.
  후반부 북동쪽의 높은 지대에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을 만들고, 북서쪽의 낮은 지대에는 금과 유리를 생산하는 공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600-641 재위) 때에 궁성으로 건설하여 사용하다가 백제 말, 통일 신라 시대에 와서 사찰로 바뀌었다.
  1965년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사리를 넣어 둔 용기와 공양물)를 발견하였다.
  궁성을 지을 대지를 만들기 위해 대규모로 흙을 쌓은 성토층과 동서 방향으로 쌓은 축대, 당대 최고의 위생 시설을 갖춘 화장실, 금속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공방 등은 삼국 시대 궁성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수부명 인장와('수부'라고 도장을 찍은 기와), 전달린 토기(위쪽에 손잡이처럼 넓적한 면을 붙인 토기), 중국제 청자 조각 등은 왕궁리 유적의 위상과 중국과의 교류 사실도 보여 준다.
  왕궁리 유적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 받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 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65년 부터 1966년까지 해체와 보수를 하였는데, 이 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엄장구(국보 제123호)가 발견 되었다.
  또한, 석탑의 건물 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인데,
  흙을 다져 메운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단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 신라 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탑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초기'등 여러 견해가 있다.



  정원 庭苑
  궁궐 앞, 뒤로 똑같이 나누면서 동서 방향으로 쌓은 네번째 축대築臺(동서석축東西石築4)의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다.
  중심시설로는 형태나 크기가 다양한 괴석怪石이나 둥글거나 넓적한 강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한 네모난 못이 있다.
  여기에 물을 모아 보내기 위하여 정교하게 만든 긴 수조시설水조施設, 그 양을 조절하기 위하여 수로시설에 잇댄 "ㄱ" 자 형의 암거시설暗渠施設과 집수시설集水施設도 만들어져 있다.
  화려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백제의 조경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궁궐 정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원 중심시설 庭苑 中心施設

궁궐 앞, 뒤로 똑같이 나누면서 동서 방향으로 쌓은 네번째 축대築臺(동서석축東西石築4)의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정원의 핵심 시설이다.
  형태나 크기가 다양한 괴석怪石이나 둥글거나 넓적한 강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한 네모난 못(지池)이 만들어져 있다.
  네모난 못으로 물이 들어오거나 나가는 수로와 함께 내부에서 물이 잘 다듬은 석재를 넘쳐 흘러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쪽으로 약 1m 떨어진 지점에서 어린석魚鱗石 2점도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둥구스름하면서 길쭉하며, 길이는 15~26cm이다.
  어린석은 중국의 정원에 장식한 돌과 닮아 중국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축대의 앞, 뒤쪽 사이의 높이 차이를 활용하여 산과 폭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곡수로 曲水路

  궁 내부의 동북쪽 구릉 서, 남, 북쪽 경사면에 위치하여 역U자형 대형수로와 함께 후원 영역을 감싸고 있다.
  구불구불한 형태로 단단한 지면을 V자형 혹은 U자형 역사다리꼴 형태로 파서 만들었다.
  구릉 서, 남사면에 L자형 형태로 연결되거나(곡수로1), 서사면에 크게 휘어져 있거나(곡수로2), 기존 곡수로 사이를 연결하거나 덧붙여져(곡수로3~6) 있다.
  부속시설로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집수시설集水施設 4개소가 있다.


  후원 後苑

  궁궐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정원으로 동서길이가 약 120m, 남북이 약 240m의 규모이다.
  북동쪽 구릉 사면에 역U자형 대형수로와 곡수로에 의해 둘러 쌓여 있고, 안팎으로 다양한 크기나 형태의 조경석으로 장식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부속시설로는, 수로를 건너기 위한 교각시설橋脚施設 1개소, 건물터 4개소, 석축시설石築施設 2개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집수시설 集水施設 4개소가 발견되었다.


  후원 중심 건물(건물지 36, 36-1)

  궁 내부의 북동쪽 구릉 정상에서 역U자형 대형수로에 둘러 싸인 공간의 좌우 중간에, 남북으로는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네모난 초석礎石을 사용한 건물터(건물지36)과 둥근 초석을 사용한 건물터(36-1)가 5m 정도 떨어져 있다.
  한 변의 길이가 대략 55cm인 네모난 초석 10매가 남아 있거나, 초석이 빠진 흔적도 확인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10m, 측면4칸10m으로 추정된다.
  지름 42~60cm인 둥근 초석은 7매가 3~4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정원수조시설 庭院 水槽施設

  궁궐 앞, 뒤로 똑같이 나누면서 동서 방향으로 쌓은 4번째 축대築臺(동서석축東西石築4)의 중앙 부근에서 동쪽 끝부분에 걸쳐 바로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잘 다듬은 네모난 판석을 세워 동서 방향으로 잇대어 만들었다.
  규모는 동서 길이 47.5m, 남북 너비 2.76m, 깊이 0.42m~ 0.54m이다.
  북서쪽 모서리 부근에서 물을 거르기 위하여 둥근 자갈을 깔았고 북벽의 일부에 둥근 홈을 팠으며, 바닥에는 넓적하면서도 큼지막한 둥근 석재 1매가 놓여 있었다.
  건물 주변에서 물을 가두어 모았다가 네모난 못으로 흘러 보내기 위한 시설이다.
  


  강당 터 講堂址
  금당 터 뒤에 있는 강당 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강당은 정면 5칸17.9m, 측면 4칸 12.6m 크기로, 건물 안이 막히지 않고 하나로 되어 있는 통간 형식의 건물이다.
  강단 터 남쪽 약 10m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는 지금의 강당 터가 있던 때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처에서는 모양이 분명하지 않은 공방 폐기장도 발견 되었다.



  건물터 3

  이 건물터는 궁궐을 만들기 위한 기초 시설로 보이는 동서 방향 석축(동서석축2)의 중간에 들어서 있다.
  땅을 판 후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 쌓아 터를 만들었다.
  건물은 한 변의 길이가 12m인 정사각형으로 보이며, 건물 주변으로는 기와를 잇댄 토관을 설치하여 배수로로 삼았다.
  위치와 구조로 보아 사찰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한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 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65년 부터 1966년까지 해체와 보수를 하였는데, 이 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엄장구(국보 제123호)가 발견 되었다.
  또한, 석탑의 건물 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인데,
  흙을 다져 메운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단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 신라 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탑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초기'등 여러 견해가 있다.



  왕궁리 유적 출토 기와王宮里 遺蹟 出土 蓋瓦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총 30만점 정도 기와편이 출토되어 다른 유물에 비해 많이 수습되었는데, 그중 일부를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다.
  기와는 왕궁리유적의 왕궁이나 사찰건물, 담장의 지붕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막새기와와 함께 시대별로 만드는 흙과 제작방법, 기와의 무늬에서 차이가 있어 유적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무왕과 익산
  무왕(600~641)의 집권기는 백제가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시대였습니다.
  554년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후 백제는 정치ㆍ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후 위덕왕ㆍ혜왕ㆍ법왕이 50여 년간 여러 방면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무왕 대에 이르러 실추된 백제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무왕은 이 곳 익산에서 새로운 백제 중흥의 꿈을 펼쳤습니다.


  "ㆍㆍㆍ무왕은 이름이 장이고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였다."


  왕궁의 공방

  왕궁의 서북편에서는 왕실에서 필요한 귀중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불에 탄 흙, 숯돌, 슬래그 등과 함께 금속과 유리 원료를 녹이는 도가니 300여 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백제 공방에서 출토된 금제품은 다양한 가공 기술로 제작하였으며, 용도에 따라 금ㆍ은 합금의 차이를 자유롭게 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7~8세기 일본 종합공방유적인 아스카이케유적에서도 왕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도가니와 생산제품이 나온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유리 제작 기술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왕궁의 부억

  왕궁의 서남편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조리와 관련이 있는 물건을 보관하는 부억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억 시설로는 불을 피우는 부뚜막, 식자재와 조리도구를 보관하는 공간, 식기류를 씻는 공간으로 보이는 배수로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에 그을려 검붉게 변한 벽체와 많은 양의 숯, 철제 솥, 음식을 담는 항아리와 병이 나왔습니다.
  왕궁의 부엌은 고대 주방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왕궁에서 사찰로

  백제 왕국은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탑ㆍ금당ㆍ강당을 갖춘 사찰로 변모하게 됩니다.
  사찰 터에서는 '왕궁사王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관궁사官宮寺' 등의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사찰의 이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왕이 익산 쌍릉에 모셔지면서 무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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