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임실군

삼요정三樂亭

방극만 2023. 6. 12. 16:27








독립유공자 삼혁당 김영원 일괄자료 도 유형문화재 지정 가결
작성자진연 박희숙|작성시간21.12.26|조회수65


  임실군에서 전라북도 문화재청에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자 신청했던 독립유공자 삼혁당 김영원 선생에 대한 자료의 심사가 2021년 문화재위원회 2분과 제8차 회의 심의 결과 가결되었음을 알려 왔다.
  삼혁당 김영원 선생( 1853~1919)은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 출신으로 1878년 26세때 정읍 칠보 무성서원 장의를 지냈으며, 이듬해 전라도 서원 색장이 되었다. 대과에 급제할 웅지를 품었으나 뇌물과 매수로 급제하는 부정부패를 목도하고 과거를 포기하였고, 1883년 선거리 선무봉 아래 삼요정을 짓고 제자들을 교육하였다.
  1889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2년 11월 수운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며, 전라도 삼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서울 복합상소, 보은집회에 참여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임실 접주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전봉준, 김홍기, 유태홍, 김개남, 그리고 손병희 군사와 합류하여 공주에서 접전하였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김학원, 최승우, 최유하, 최동필, 한영태등과 함께 6년간 회문산에 은거하였다.
  1900년에 상운면 훈장을 지냈으며, 1904년 운암출신 최승우의 재정지원을 받아 전주에 창동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06년 임실군 청웅면 양지리에 삼화학교를 세웠고, 1907년 천도교 임실 및 순창교구장을 겸직하였다. 1916년 성문회를 조직하고 성문사를 설립하여 민종계몽지<운무지> 발간 사업을 추진하던 중 일본에 의해 강제 폐회되었다.
  1919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박준승과 양한묵을 3.1운동에 민족대표33인으로 추천하였다. 이후 임실에 내려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고초를 겪다가 1919년 8월 26일에 순국하셨다.
  1963년 대통령표창 추서되었고,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되었으며, 1993년 국가유공자에 추서되었다.
1921년 강제 철거되었던 민족교육의 요람 삼요정은 2002년 복원되었고 2003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김영원은 1894년 7월 접사로 임명되었고 1894년 8월 접주로 임명되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천도교의 지도자로 활동한 것은 1903년에는 손병희 북접대도주로부터 용담연원 검악포덕의 명첩을 받으시고, 1907년에는 교령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집강에 임명되었고, 1912년 임실군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894년 임실지역 천도교의 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실지역에 1873년 동학이 전래된 이래, 동학의 교세가 매우 빠르게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월 18일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임실은 모두가 동학도이고, 오수역도 또한 인민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오수역에 들어가 동학당 5명을 붙잡았다. 임실에서 붙잡은 교도도 7~8명 있었다. 이와 같이 한 개의 현이 모두 통들어 동학도인 지방은 동학도가 역적임을 알지 못하므로 인민들이 취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우선 인심을 바로 잡기 위해 접주 5명을 죽이므로 해서 인민들은 비로소 동학에 가담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깨닫게 된것 같다.  포로중 죄가 가벼워서 사면된 자는 14~5명이 되고 대개는 포박하였다가 사면 했지만 앞에 쓴 5명은 접주이고, 그 죄가 크므로 총살한 것이다."

- 위 내용은 삼혁당 김영원선생추모회에서 2018년 발간한 임실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도록 『영춘』, 2020년 발간한 『독립유공자 삼혁당 김영원』에서 발췌한 자료임 -

동학혁명당시 전국에 동학인들이 참여하였지만 그 중에 마을 사람들 전체가 참여한 곳이 임실지역인 것 같다.  동학 혁명에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만큼 피해 또한 컸다. 그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학을 모른다고 말하였고, 지금은 자손들조차 할아버지가 동학혁명에 가담한 사실조차 모르는 현실이 되었다. 지금도 연세 많으신 어르신은 "동학 이야기를 해도 잡아가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분마져 있는 현실이다보니 그 고초가 얼마나 컷고 힘든 세월을 사셨는지 느낄 수 있다.  이제는 후손들마저 연로하시고, 그 후손들이 거의 타 종교인이 되었고, 임실에 하나 있는 천도교교당은 폐허에 가깝게 변해가는 실정에 있었다.

  마침 임실군의 문화재 발굴에 힘쓰고 계신 김철배 학예사의 노고 덕분으로  천도교임실교구는 국가등록 문화재로 등록되게 되어 보수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천도교라는 이름은  1906년 천도교 3세교주이신 의암 손병희선생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였다. 개명에 대한 배경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나라는 일본인이 동학교도를 말살하려는 의지로 동학도인을 잡아 죽였기 때문에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종교의 자유는 허락되는 시대였기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것이다. 손병희선생은 그 당시 일본에 있었으나 천도교로 개명한 후 입국하여 3.1운동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