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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3차 21코스 3-3 : 산동~주천 15.9km (밤재~주천) 2022.12.11

방극만 2022. 12. 14. 17:48




지리산 둘레길21코스 : 산동~주천 15.9km 1-3 (산동~현천~연관마을) 2022.12.11 - https://bkm2400.tistory.com/m/2131

지리산 둘레길21코스 : 산동~주천 15.9km 1-3 (산동~현천~연관마을) 2022.12.11

둘레길 산동~주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서 남원시 주천면을 잇는 15.9km의 지리산 둘레길로 지리산 서북능선의 종석대와 고리봉 그리고 만복대와 견두지맥상의 영제봉(솔봉능선)을 바라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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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21코스 : 산동~주천 15.9km  2-3 (연관마을~밤재) 2022.12.11 - https://bkm2400.tistory.com/m/2132

지리산 둘레길21코스 : 산동~주천 15.9km  2-3 (연관마을~밤재) 2022.12.11

20221211_100729 연관마을을 떠나면서 20221211_101029 20221211_103842 20221211_104156 20221211_104427 계척마을 조선시대(선조) 임진왜란을 피해 오씨와 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 마을 중심에 흐르는 냇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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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재  ~   주천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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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침략으로도 모자라 왜적 통치자는 정유년(1597)에 재침을 명하였고 다시 악귀가 된 왜적은 빼앗고, 불사르고, 베고, 찌르며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를 거쳐 남쪽으로 보이는 원촌에 이르렀다.
여기, 밤재(栗峙)를 가운데로 동쪽의 숙성재와 서쪽의 둔산재를 짓밟고 넘은 침략군은 북쪽으로 보이는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여 민.관을 비롯한 조.명 연합군 1만여 명을 도륙하였다.
당년 추석 전후의 일이다.
살인귀 왜적은 코베기와 노예화를 위한 인질 포획을 시도했으나 살아있는 생명은 없었다.
약탈, 겁간, 방화, 살육의 잔재만 남았을 뿐이었다.
갑오년(1894)에도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토벌군이 되어 토끼몰이를 하면서 북에서 남으로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로 우라나라와 민족을 집어삼킨 일제는 이 고개를 약탈과 지배의 수단인 신작로로 만들었다.
일본 왜적에 대처하지 못한 우리 조상들의 잘못이 작지않다.
그러나 전쟁을 비롯한 모든 침략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면서 하늘을 칼질하는 인류 최악의 범죄다.
그런데도 일본은 단한가지, 단한번의 공식적인 반성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옛 침략의 환상 속에 또다른 침략의 칼날을 갈고 있다.
이에 일본을 극복하지 않은 한 우리에게 평화는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되새기고, 성찰과 실천을 다짐하기 위해 더럽고 잔혹한 왜적 침략의 족적이 찍혀 있는 이 자리에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이 석비를 세운다.
정유재란7주갑 2017년 9월 26일
남원시.구례군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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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익경 효자비각(柳益涇 孝子碑閣)
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 494
  류익경(柳益涇)의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서산(瑞山), 정숙공(靖肅公) 류방택(柳方澤)의 증손으로 1411년(태종11년)에 충남 서산에서 사간원 류미(柳美)의 넷 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부친께서 단종의 손위(遜位 : 임금의 자리를 내어 놓음)에 남원부 서문 밖(현 남원시 왕정동)으로 옮기어 살았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어느 해 부친 병환 중에 잉어를 원하시자 새벽 요천에 나가 얼음을 깨뜨리니 쌍잉어가 튀어나와 시탕하였으며, 모친 현씨 병환에는 대변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하였고, 고사리를 원하시자 설중(雪中)에 교룡산 밀덕봉의 한 골짜기에서 구하여 봉양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그 골짜기의 이름이 채미동이라 불려오고 있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들리어 1479년(성종10년) 동부녹사(東部錄事)에 특배(特拜)되고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한 비각)를 제수(除授)하여 세거지인 남원부 서문 밖 교룡산 기린봉아래에 정려(旌閭)를 건립하였다.
  
  그 후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소실(燒失)되었으나, 1703년(숙종29년)에 고관부립(告官復立)하여 장손의 피난지인 숙성령 아래 현위치에다시 건립하여 관리 보존하고 있다.
  남원이 이백면 초촌리 산 132-1번지에 묘소와 재실이 있으며 묘소는 남원에서 보기드문 500여 년이 넘은 부친 류미(柳美)의 묘소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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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마을은 해발 1,050m의 영제봉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바다 속 용궁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 산수유 군락지의 꽃이 유독 색이 진하고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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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의 시.종점으로 모든 둘레객이 이 곳에서 시작하여 이 곳으로 와 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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