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출발하면서
현대옥콩나물국밥으로

10:20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
군계휴게소

다산박물관







들어가는 말
6다산은 성호 이익을 사숙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실학에 뜻을 두었다.
청년기 그는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십수년 관직생활 동안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서학.천주교 신앙문제를 빌미로 삼아 부패한 세력의 모함으로 되돌아 왔고,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당시 민인民人들은 무책임한 관료와 포악한 아전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유배지 강진은 다산에게 새로운 인식과 학문을 요구하였다.
다산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자신의 학문세계를 성인의 참 뜻에 두고, 세상을 바꾸는 실천의 사상적 토대틀 위해 경학연구(유교 경전의 재해석)에 몰두했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해결책을 찾아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였다.
500여권이라고 밝힌 다산의 저작 활동은 주로 강진 유배기에 이루어졌다.
방대하면서도 조리정연하기까지 한 다산의 저작은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이겨낸 인간 승리이겠으나,
한편 이 과정에 유배지에서 만난 제자들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다.
유배지에서 키운 제자들은 스승 다산의 연구와 저술을 도왔다.
일종의 분업적 집체저술이었다.
강진의 제자들에는 친척이거나 양반 자제도 있지만, 읍중 제자들[아전]과 승려들도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과 그 제자들은 절망을 딛고 희망주의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주제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19세기 학술사에 의미있는 성과를 남겼다.
다산과 다산학은 강진-해남: 진도 같은 먼 바닷가의 고을에 '문명의 고을[明門鄕]이란 명예를 안겼다.

다산과 천주교
다산 정약용이 23세이던 4월 봄, 고향인 마제에서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내려오던 배안이었다.
이 때 함께 다녀오던 큰 형수의 동생 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고 이때에 비로소 천주 고리를 접하게 되었다.
다산 선생은 이때의 감회에 대해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초나 육신과 정신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들으니, 황흘하고 놀라워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하였다. -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 中 -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도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사를 받고 돌아와 청년 유교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열었던 신앙집회에 천주교 교리틀 공부하고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앙집회가 형조 관헌에 적발되어 을사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曺摘發事件이 일어났고, 다산이 30세 때 외사촌 윤지총이 천주교 신앙에 빠져 제사를 폐지한 일로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하는데, 이후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이 내려졌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 이벽을 따라 천주교 교리틀 들고 천주교 서적을 보았으며, 정미년(1787) 이후4~5년 동안 마음이 기울었는데, 신해년(1791) 이래로 나라의 금지령이 엄중하여 마침내 생각을 끊어 버렸다." -

다산 정약용이 종7품의 직장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초계문신들에게 대학을 강의 하였는데, 정조임금은 정약용에게 유교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그 강의내용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왕의 뜻을 헤아린 정약용은 열성을 기울여 책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대학강의를 토론한 내용이 담긴 r희정당대학강의熙政當大學講義를 책으로 펴냈고, 정조는 정약용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인정하여 장차 규장각 각신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정약용이 관직에 나간 첫해인 1789년 10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설계하는 막중한 임무를 정약용에게 맡겼다.
배다리란 한강 폭 만큼의 여러 배를 질서정연하게 가로로 배열하여 이어 묶고 널빤지를 깔아
연결하는 방식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배를 배열해야하므로 복잡하고 설치하는 방식이 까다로워 수학적 계산능력이나
과학기술의 원리를 응용해야 하는데, 정약용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정조가 이같이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1792년 4월 진주목사로 재임중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해 겨울 정조는 상중에 있는 정약용에게
수원화성의 축성을 위한 설계와 공사를 위한 규정을
지어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상중이지만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은 임금의 신임이 각별했음을 알수 있다.
다산 선생은 1794년부터 수원화성 건설에 착수하여 성곽건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6km나 되는
성곽과 600여칸의 거대한 공사를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마칠 수 있었다.

규장각의 초계문신 시절
규장각圭章閣은 정조 탕평 정치를 보좌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황실 학술기구였다.
특히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관료들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켜 더욱 학문을 연마하게 한 제도였다.
다산은 1789년 3월 문과에 급제한 후 곧바로 초계문신에 뽑혔다.
그는 규장각에서 우수한 인재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정조의 명으로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의 운영 방안을 기록한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지었고. 당시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던 박제가朴濟齊家 등과의 만남을 계기로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북학파의 저술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引日 슬픔을 적다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門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轉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순가 밤 되어 노량路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제4권, 시








다산친필편지
정약용丁若龍1810
유배 중 다산의 차 생활 및 의원으로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편지이다.
정약용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이 날로 퍼져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자신의 거처가 의원이 된 것 같다며 불편한 기색을 비치기도 했다.

정약용 친필편지
정약용丁若龍 실학박물관
차를 복용하는 법에 관한 다산의 의견을 전하고 있다.
차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하고,차를 청하는 수신인에게 좁은 집에 차주머니를 걸어두면 생활에 방해가 되어 아주 괴로울 것이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라고 완곡한 거절의 뜻을 함께 전했다. 다산이 차를 아껴 아무에게나 선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시현에게 주는편지
정약용丁若龍1830 백운동전시관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에서 강진에 있던 제자 이시헌에게 떡차 만드는과정을 설명하며 두릉으로 차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이다.
떡차 만드는 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그대로 만들어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다산의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다산의 제다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편지이다.

여유당전서 제1집 제3권시문집
與猶堂全書
정약용丁若龍 1805년 국립중앙도서관
[여유당전서]제1집 제3권에는 다산 정약용이 혜장惠藏에 차를 청하는 시 두편과, 스승인 혜장은 보내주지 않던 차를 제자인 색성이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시가 실려있다.

다산친필편지
정약용丁若龍 1816
1816년 정약전의 상을 당한 정약용이 부의를 보내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형님이었지만, 정약용은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형님을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져 있었다.
이때 정약용을 위로해 주며 슬픔을 견디게 해준것도 제자들이었다.
편지 말미에 '다병茶甁(떡차) 50개를 보내네 라고 쓰여있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우뚝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수없고
위에 있는 높은 누대 하늘 끝에 닿았도가
북두로 은하수 길어 한밤에 차 끓이니
차 연기 싸늘하게 달속 계수나무 감싸네
진각국사 혜심의 차시

월남사지 출토 차맷돌
월남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굴된 차맷돌이다.
차맷돌의 출토는 당시 사찰에서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셨음을 엿볼 수 있는 출토품으로 이것은 월남사 승려들이 차를즐겨 마셨다는 점과 월남리에서 일찍부터 제다와 음다를 하였다는 점을 추론케 한다.



다산초당 중건 공적비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53년 문재은 선생은 고향 급동마을에 내려와 주춧돌마저 없는 다산초당 터를 보며 안타깝게 여기어 전대부터 바라던 초당을 중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윤재은 선생은 다산초당 중건을 위해 1956년 10월 26일 [정다산유적 보존회]를 조직하였다.
66명의 발기인 대회를 개최한 뒤 부지를 제공해 준 율동 윤재청의 지원 아래 각계각층의 중건 비용 모금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1958년 준공된 다산초당은 1959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은 점약용이 유배기간 동안 500여 권을 저술하여 조선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2012년 유네스코는 세계기념물로 정약용을 선정하였다
다산초당 중원을 위해 밤낮으로 온 몸 바치신 윤재은 회장과 뜻을 함께 한 65명 발기인들. 기부금과 재물을 내신 분들. 수많은 목재와 기와 등을 초당 터까지 운반한 인근 주민(귤동 덕산 신평 보동 마점 율표. 표장)과 중간에 힘을 보태 주신 모든 분들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정성과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윤재은 회장과 발기인 65인, 주민들의 공적이여!
다산 정약용 선생의 크신 가르침 잇고자
허물어진 빈터 다듬어 다산초당 중건하였으니
거룩한 그 공적 영원히 기억하리라!
송령松嶺 윤재은(尹在殷) (1894 ~ 1969)
전남 강진군 도암면 귤동 출생
보성전 전 학교(현 고 려 대 학 교) 졸업
㈜조선상업은행 장흥 순천 지점 지 배인
조선전업주식회사 상무이사 겸 경리부장
정 다산유적보존회장(1957~1969)
문교부장관 표창장 수상 (1958)






다산회당茶山會堂
•위치 :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5
건축연도 : 1983.8.
면적 : 77m2
관리 : 강진군 다산박물관
다산회당은 1983년 조순 전총리, 한승수 전총리, 김성훈 전농림부장관등 다산 정약용 선생을 흠모하는 다산회원 16명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전통한옥 건축물입니다. 건축면적 77m2로 구성된 이 한옥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민ㆍ위민 정신을 연구하고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1999년 6월, 다산회당은 강진군에 기부채납되었으며. 현재 강진군의 자산으로 다산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귤송당橘頌堂
다산(茶山 )이 47세이던 1808년 봄에 강진 보은산
고성사에서 윤단(1744~1821)이 귤동의
윤씨산정(다산초당)으로 다산을 모시고 왔습니다
지금은 윤단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습니다.
아래의 초옥 전경과 전면의 은행나무는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다산과 추사 그리고 선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쉬어갔던 곳입니다.
※편액 :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道場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정다산 유적 사적 제107호 Historic Site No. 107
Dasan Jeong Yak-yong's Residence in Exile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밤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評>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서암
다산초당과 서암
茶山草堂,西庵
Dasan-chodangandSeoam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면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초당
정약용(丁若龍)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尹박의 山亭)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
)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 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 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다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 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 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 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서閣)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론다.



동암東巖
송풍루라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기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巖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해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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