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2024.10.22
자하 동굴 하늘의 지명 유래 입석석에 적힌 글
“高麗 忠肅王때 侍中 蔡公 諱 洪哲선생이 京畿道 開城 松嶽山 물이 많으며 반석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은 자하동(紫霞洞)에 살았는데 집을 "中和堂” 이라 짓고, 연세 드신 많은 분들을 모시고 좋은 음식을 봉양 (奉養)하며, 노래(樂唱)를 돌려드렸다”고 高麗史、樂志, 俗樂條에 전해 내려온 후, 옛 선비들이 경치와 산수가 좋은 곳을 "자하동천(紫霞洞天)" 이라 일컫었으며, 그 이후 이화동천(梨花洞天), 도화동천(桃花洞天), 무릉동천(武陵洞天) 등도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자락 계곡도 산수가 빼어나 옛부터 자하동천紫霞洞天)으로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는 것을, 通政大夫 行 昆陽, 玄風, 比安郡守를 재임하신 晉陽 河公 衛 在鳩 선생(高宗 甲子 1864년~高宗 丁酉1897년)께서 自宅 앞 (火王山에서 발류하여 내려오는 南昌川 주변 창녕읍 말흘리 851번지)에 있었던 자연석 큰 바위(높이 약 3.8㎞, 폭 약2.7㎡)에 130여년 전에 새겨진 이후 자하동(자하골, 작골)정착되어 불리워졌다.
자하동의 풍광을 잃은 詩가 아래와 같이 전해 내려오는데
“ 清霞가 엷게 치니 紫煙이 分明하다.
만발한 붉은 꽃은 紫煙裙을 헤쳤는가
流霞酒 盈樽하여 煙霞興을 자아내니
煙霞의 紫微宮이 朝霞에 떠오른다
東은 火王, 西는 銀線洛江, 南은 貫珠, 北은 牧馬 綠水는 끊임없이 滄江에 흘러르고
崎嶇石選은 風景이 多情하다" (이詩는 빛벌문학 117쪽에 실려있다.
"청하가 엷게 치니 자연이 분명하다.
만발한 붉은 꽃은 자연군을 펼쳤는가
류하주 영준하여 연하흥을 자아내니
연하의 자미궁이 조하에 떠오른다
등은 화왕, 서는 은선낙강, 남은 관주, 북은 목마
녹수는 끊임없이 창강에 흘러들고
기구석경은 풍경이 다정하다"
오랜 서울동안 큰 바위의 글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2009년 큰 홍수로 인해 훼손된 것을 창녕향토사연구회에서 자료를 제공하고, 椎厓 金周奉선성님의 글씨를 받아, 宇友 梁漢吉 선생님 刻하고, (주)古榮文化財 시공으로 창녕군에서 복원, 설치하게 되었다.
2013년 7월 謹立
창녕군수
본격적인 화왕산 산행 시작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Ancient Tombs in Gyo-dong and Songhyeon-dong, Changnyeong
사적 Historic Site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구릉 일대에 조성된 고대 비화가야 왕과 지배 층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까지 이어진다.
고분군에는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 120여 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 180여 기 등 모두 300여 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분포에 따라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둘러싸고 중소형 무덤이 밀집 분포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墓*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다.
하나의 봉분 안에 하나의 덧널이 있는 형태이며, 별도의 딸린덧널附槨이나 순장덧널殉藏槨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가야 고유의 무덤 구조인 구덩식돌덧널무덤에 입구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로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무덤 형태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만들어진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공간을 구획하여 쌓아 올렸는데, 이는 철저한 계획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이자 낙동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여러 가야는 물론이고 신라, 백제,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라·백제에서 전해지거나 영향을 받은 장식말갖춤 裝飾馬具, 금동관金鋼冠, 청동세발손잡이솥青銅製錐斗,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 은제허리띠와 대가야의 귀걸이, 일본산 녹나무로 만든 관, 사슴뿔로 만든 긴칼長劍, 조개장식 말띠꾸미개貝製雲珠 등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 외 출토된 토기는 비화가야만의 특색 있는 무늬와 형태를 가진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를 비롯해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긴목항아리長鏡壺가 대표적이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대부분의 무덤들이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녕이 신라로 편입된 이후인 7세기까지 고분군 내에 신라식 돌방무덤이 소규모 군집 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가야에서 신라로의 무덤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의 성립과 발전, 가야에서 신라로의 전환 과정, 고대 한반도 안팎의 정치 세력 간 교류와 교섭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 구덩식돌덧널무덤 : 돌로 네 벽을 쌓아 덧널을 만들고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음 천장돌을 덮는 무덤 양식. ** 앞트기식돌방무덤 : 돌로 세 벽을 쌓고 천장돌을 덮어 무덤방을 만든 다음, 한쪽으로 시신을 넣고 무덤 입구를 막아 추가 합장이 가능하도록 만든 무덤 양식.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송현동 II지구
Ancient Tombs in Gyo-dong and Songhyeon-dong - Songhyeon-dong Zone II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에서 이어지는 구등의 성사면과 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 계곡부 를 경계로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누어진다. 그동안 발굴 조사된 무덤 명칭을 고려하여 각 지구의 이름은 '교동 지구'와 '송현동 지구'로 구분하는데 각각 교동 Ⅰ·Ⅱ지구, 송현동 Ⅰ·Ⅱ지구라고 부른다.
송현동 2지구는 교동과 송현동 무념의 가장 동쪽인 화왕산 중턱에 있다.
송현동 1지구에서 1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자하곡을 따라 화왕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해발 340~435m의 고지대에 분포한다.
이곳에서 6기의 봉분과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 25기 정도가 확인되었다.
봉분은 직경 21m 정도인 1호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형이며 밀집도는 높지 않다. 대형 무덤 주변에 중소형 무덤이 둘러싸는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송현동 2지구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동쪽 경계가 화왕산 중턱까지로 확대됨을 보여준다.
창녕 화왕산성 昌寧 火旺山城
Hwawangsanseong Fortress, Changnyeong
사적 Historic Site
창녕 화왕산성은 화왕산(해발 756m)을 감싸고 있는 퇴뫼식 신성*이다.
화왕산성은 둘레가 2.7km에 이른다.
현재 성벽을 비롯하여 동물과 식물,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가 남아있다.
화왕산성은 비화가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창녕의 군사적 중심지로 활용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근거지로 살아 큰 전공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화왕산은 세종실록지리지 에 창녕의 진산***으로 소개되어 있다.
아들러 저수지에서 제사와 관련된 철제 무기와 용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복제 인형, 동물 뼈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창녕지역의 제의를 담당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화왕산성은 예로부터 창녕을 수호하는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실체가 남아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퇴메식산성 : 산꼭대기를 순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
**집수지集水地 : 성 내 군사들의 식수와 방화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두는 시설
화왕산 정상에서는 이정표가 없이 길만 나 있는데 따라가다보면 억새밭을 구경하는 화왕산성을 걷게 되는 바,
하산하려면 지나 온 산성 북문지로 되돌아가 3등산로나 서문방향에 있는 1,2등산로를 찾아야 한다.
기분좋게 올라와 억새를 보는 맛이 일품인데 하산 길을 나만 헤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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