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4차 9구간 역방향 위태~덕산 2024.06.02
위태마을
위태마을은 예전에 상촌으로 불렸다.
상촌의 원래 이름은 갈티마을이었다.
갈티라는 지명은 이곳에서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 갈치(葛峙)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 고개는 예전에 덕산장을 오가는 장꾼들이 넘나들었던 길이었고, 일제 때에는 목탄(숯)을 실어 나르기 위해 차량 통행이 가능한 신작로로 정비하였던 길이었다. 마을이 청암면에서 옥종면으로 편입되면서, 옥종면 청룡리 상촌마을과 구분하기 위하여 위태리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회관이 있는 진등을 비롯하여 안몰, 중몰, 괴정지 등 여러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다.
중태(위태)재
위태마을에서 예전 화전민들의 고된 삶의 흔적인양 묵은 다랭이 논밭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위로 울울창창한 대나무 숲이 이어지는데, 숲의 시작지엔 작고 평온한 저수지가 산길이 시작 되고, 마을이 멀어져 간다고 알려주는 듯한 가운데 1.9km쯤 오르면 고갯마루에 닿는다.
고개는 산청과 하동의 분수령이다.
덕산사람들은 소금을 구하려 고개를 넘었고,
하동사람들은 덕산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산청사람들은 중태재라 부르고 하동사람들은 위태재라 부른다.
유점마을
중태재에서 고개길을 내려오면 유점마을이 나온다.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한 마을이다.
예전에 유기(놋그릇)를 만들던 마을이라, 놋점골이라 불리웠다. 지금은 유기 만들던 흔적은 사라지고, 1938년부터 안식교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어 ‘안식교 마을’이라고도 한다.
중태안내소
중태마을에 다다르면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가 있다.
농가 피해를 줄이고 마을이 자율적으로 지리산둘레길 안내를 담당하겠다는 소망을 담아 마련했다.
지나가는 순례자가 다리 쉼을 하고, 화장실도 들릴 수 있다.
이곳을 오가는 순례자들이 책임여행과 공정여행을 다짐하는 기록을 스스로 남기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055-973-9850
중태마을
중태마을은 오래전부터 닥종이 생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지금은 닥종이 소비가 끊기면서 닥나무 대신 감나무가 들어섰다. 중태마을은 동학혁명 때 마지막 녹두꽃이 떨어졌던 곳 가운데 하나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추격하던 관군을 맞서 이곳에서 목숨을 버렸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관군의 눈을 피해 농민군의 주검을 인근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가매장되었던 골짜기는 아직도 ‘가장골’로 불린다.
덕산
‘덕(德)이 있는 산(山)’이라는 이름의 덕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예전 덕산은 현재의 시천면과 삼장면을 두루 아우르는 지명이었으나,
현재의 덕산은 시천면 소재지 일대를 통칭하는데,
행정구역상 명칭은 덕산이 아닌 시천면 사리(絲里)이다.
덕산은 시천의 물길과 삼장천의 물길이 합해지는 양단(兩端)의 두물머리이며,
여기서부터는 덕천강(德川)이 된다.
남명선생은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노래하였다.
“두류산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산천재
덕산은 ‘조선 선비의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고 일컫는 남명 조식 선생이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던 곳이다.
사적으로 남명의 유품과 서책, 신도비, 남명 석상 등이 있는 남명기념관을 비롯하여 산천재, 덕천서원, 용암서원, 세심정, 선조대왕이 내린 제문 국역비 등이 있다. 남명이 생전에 직접 터를 잡은 묘소도 산천재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건너편에는 남명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가 마주하고 있다.
산천재 담장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눈 앞에 있고, 마당 가운데에는 산천재를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는 홍매가 있다.
‘산청 3매’ 중 하나인 ‘남명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