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올레길/지리산둘레길 4차

지리산둘레길 4차 18구간 역방향 : 방광-> (삼밭재 등산) ->오미 12.3km 2024.02.04

방극만 2024. 2. 4. 22:23



07:02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주차장에 차 한대 파킹 후 방광리로 출발
07:28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참새미 마을에서 지리산둘레길 18코스를 역방향으로 운조루를 향해 출발했는데 10:30 방광 7.6km 에서 삼밭재 등산로를 따라 13:44 오미리 운조루에서 끝냄.

08:12 광의면 수월리 수한마을
08:49 당촌마을 인근에서 산 속 오솔길로
08:58 반달가슴곰 보금자리 조성지
09:21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로에 위치한  지리산 남부 탐방안내소
09:59 황전리 청내골 방죽
10:25 마산리 녹차와 매실밭
10:30 지리산 둘레길에서 삼밭재 등산으로 :  (지리산둘레길 18코스 오미 4.7km, 방광 7.6km 지점인 가랑마을 뒤에서 가던 길 멈추고,
자연장지~삼밭재~용두마을 등산로의  자연장지에서  0.8km 거리에 있는 삼밭재로 가는 등산로 가랑마을 뒤 삼밭재 1.7km,  토지면 용두마을 4.9km 거리의  이정표를 따라 삼밭재까지 오르고 다시 용두마을로 하산을 하여  13:22 하사마을 삼거리에서 용두마을 옆길인 임도로 운조루산림욕장을 지나 13:44 오미마을 운조루로 하산)
11:06 편백숲 신 조성지
11:34 삼밭재 500m 전 능선
11:54~11:59 자연장지에서 2.5km 거리의 삼밭재에서 용두마을(3.2km)로 하산 : 더 오르는 길은 보이는데 이정표가 없슴
12:19~12:53 문수골을 아래로한 바위에서 산중 점심
13:02 능선삼거리 : 용두마을 2.7km : 삼밭재에서 용두마을은 3.2km인데, 이 곳에서 부터 4.0km로 나온다
13:09 능선삼거리 : 용두마을 2.3km
13:15 용두마을 1.9km
13:22 하사마을 삼거리에서 용두마을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내려 옴 : 용두마을 1.6km
13:28 운조루 산림욕장 : 문수저수지 400m, 오미저수지 1.14km, 산림욕장 900m 갈림길
13:30 운조루 산림욕장 : 오미마을 500m, 오미저수지 1.2km, 산림욕장 700m 갈림길
13:41 운조루 100m 쉼터
13:44~13:52 오미리 운조루

14:20~14:30 마산면 냉천삼거리 농부카페에서 라임C 두 잔과 아메리카노 커피 두 잔 그리고 사탕수수 사탕 세 봉지와 쿠키 한 봉지에서는 한 개의 첫 쿠키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입에서 걸린 머리카락을 발견 여자분 주인께 주었는데 교환해 준다는 말도 없이 웃으며 다른 말로 얼버무리고 말아 기분이 영 아니었는데 먼저 먹다 남은 덜 익은 카카오 열매를 그냥 먹으라 먹어 대신하여 불만 표시없이 그냥 나와 영자처제와 헤어졌다.








소원 바위
방광권역마을의 소원바위는 본래 계곡에 자리잡고 있던 것으로서
무당들이 자연의 신비스런 힘이 있다고 하여 굿을 하던 바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막에 있는 문명은 척박한 땅보다 하늘을 더 숭배하였기에 절대자를 기렸으나,
우리 민족은 퐁요로운 땅에서 살았기에 하늘뿐만 아니라, 땅의 온갖 생명과 물질들에 대해서도 자연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하였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그들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을 경이롭게 바라 봤는데,
아마도 수억 살을 살면서 깨지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 바위에게도 모종의 경외감을 느꼈을 겁입니다.



보호수 : 1982.12.03 지정, 수령 500년, 나무둘레 4m, 광의면 방광리 868,
정월대보름 날 밤 이장이 제주가 되어 마을의 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냄

느티나무는 어릴 때부터 쑥쑥 자라고 크게 자라며 오래살고,
또한 가지가 넓게 퍼지기 때문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때문에 마을 어귀에 쉼터 겸 보호수로 많이 심었고,
느티나무는 오늘까지 시골마을 곳곳에 나이 든 노거수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방광권역 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들은 모두 당산나무 입니다.
당산나무란 크고 오래 사는 영험한 나무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특별하게 아끼고 기리는 나무를 뜻합니다.
공북마을에서는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에
왼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을 이어 당산제를 올렸습니다.


방광마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남양 홍씨가 피신해 거주한 후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서 판관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
즉 판관이 팡괭이로 변했다가 다시 방광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다른 전설도 있다.
지리산 우번대라는 암자에 노승과 사미스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천은사 뒤 계곡을 오르다가 사미스님이 남의 밭에서 조 세 알을 손에 쥔 것을 본 노승이 '너는 주인이 주지 않은 조를 가졌으니
주인집에서 3년간 일을 해 빚을 갚으라"고 말하면서 사미스님을 소로 변신시켰다.

그 날 밭주인이 소를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소가 여물 대신 밥만 먹었고,
쇠똥이 땅에 떨어지면 빛을 내면서 곡식이 잘 자랐다 해서
방광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리산 차일봉(종석대) 아래 마을인 구례 방광마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첫 번째, 소원바위는 지리산 산신이 반달 모양의 참새미마을 계곡에 반해 자주 놀러 왔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가 간절하게 자식을 기원하는 소원을 빌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낙네의 정성과 소망이 너무 애절하여,
그에 감복하여 노고단 정상에서 가져다주었다는 바위로
아낙네가 바위를 품고 소원을 빌어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다.

두 번째, 아버지 감나무는 100여 년 전에 마을 아낙네가 소원바위에게 아들을 빌고 난 후 아들을 얻어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심었다는 감나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 전체 감나무에게 수꽃을 제공해 열매를 맺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나무라고~~

세 번째, 당산나무는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로 약 530년되었다.
지리산 산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위해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매화의 벙그러진 꽃봉우리
* 벙글다 : 아직 피지 아니한 어린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 망울이 생기다라는 동사.

매화꽃 망울을 보니 벙그다란 글이 쓰인 이 번 둘레길의 생각나는 묘비가 있다.
개성인開城人 왕두석王斗錫님
전주인全州人 이종순李鐘順님의
후손은
진달래 벙그는 날
지리산 선영에서
자연으로 가는 집을 찾았네
섬진강 은어떼도 거슬러 오네

화엄사길 황전리 월등파크로 가는 길목 반달가슴곰 보금자리에서 5분거리 수목장 묘비인데 이 번 트레일에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사성암 : 의상대사·원효대사·도선국사·진각국사가 수도했다 해  불리는 암자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


가랑마을 뒤





삼밭재 : 가랑마을 뒤 (자연장지0.8km) ~ 삼밭재 ~ 오미리 운조루 2024.02.04 (지리산둘레길 18코스 : 오미~방광 트레일 중 - https://bkm2400.tistory.com/m/2465

삼밭재 ~ 오미리 운조루 2024.02.04 (지리산둘레길 18코스 트레일 중에)

bkm2400.tistory.com






운조루에 오는 탐방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놓아둔 것으로, 대대로 내려온 '타인능해 뒤주'는 '운조루 유물전시관'에 있다.

운조루 : 사랑채 누대의 이름으로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 ‘구름[雲] 속에 새[鳥]처럼 숨어 사는 누대[樓]’란 뜻

타인능해他人能解 : ‘다른 사람이 열어도 된다’, 바꿔 말해 ‘누구나 쌀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


'운조루 유물전시관'에 전시돼 있는 '타인능해 뒤주'.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굴뚝
집 뒤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 찾기가 힘들다.

밥 짓는 냄새나 연기가 이웃에게 퍼지지 않도록 축대 아래쪽에 배치한 운조루 고택의 굴뚝에도 250년 전 이웃을 배려한 건축주의 마음이 느껴진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오미마을
영조 52년(1776년) 문화 류씨 류이주(柳爾胄 1726~1797)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鳥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렸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 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 하여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 금가락지가 떨어 진 모양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고 이제는 엉뚱한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
이 부분에서 호랑이 뼈다 아니다라며 종부인 할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 뼈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것이 조상의 용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손들이 바친 훈장인 바에야.
호랑이 뼈의 주인공 유이주가 바로 이곳의 문화 유씨 입향조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눌러앉았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 다음 백과사전 --





아침에 차량 파킹하면서 본 운해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