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평교 ~ 무직산 정상 1-2 (금평교 ~ 무직산 ~ 호정소 ~ 금평교) 2023.04.04
구림방향 회문산로를 따라 오면 금평교 왼 쪽 입구에 호정소 수변산책길과 호정소등산로 이정표가 있는데 예전에 표시한 것으로 무직산을 찾을 수가 없는데 다리 건너 오른 쪽 길을 따라 올라 가다 보면 무직산 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금평교를 지나면 예전 안내도가 나온다.
딱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금평교 부근에 2~3대 정도 파킹이 가능하다.
오른 쪽 호정소수변산책길을 150여 m를 걷다보면 왼 쪽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고 또다시 150여 m 오르면 그제서야 무직산 등산로 안내 표지판이 나와 무직산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이 표시는 옛 표시로 그냥 따라 가면 된다.
뒤돌아 보니 금평마을과 금평교가 보인다.
요산요수님의 블러그 인용 글
내려다 본 금평마을..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치천(淄川)이다.
평평한 비단마을이란 뜻을 가진 아름다운 금천리 금평(錦坪)마을 이건만...
마을 앞을 흐르는 <치천>에 아픈 역사가 있으니..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순창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순창군수 배경남(裵慶男)은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하였고,
일본군 500여명이 무인지경으로 순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읍민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은 피난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다.
일본군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백성들을 무차별학살하였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북쪽인 구림면 금천리로 도망하였는데, 이곳 <치천>의 물가에서 모두 학살당하였다.
珷織山
한자로는 옥돌 무(珷), 짤 직(織)으로 옥돌로 만들어 진 산이라는 의미이다.
임금님 옥새와 비슷한 모양의 옥새바위(385m)와 한반도 지형 전망대 이외에도 탐방객의 관점에 따라 이곳 저곳에 숨겨진 명소와 명물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도 있다.
산 아래에는 한반도 지형을 아우르는 호정소를 따라 3km 수변 산책로가 있어 등산과 트레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주요구간 : 금평교-옥새바위-410봉-한반도.옥새바위 전망대-무직산 정상-제2한반도 전망대-부처바위-암릉구간-호정소 수변산책로
산행거리 : 약 7.3km(호정소 둘레길 3km 포함)
산행시간 : 약 4시간(호정소 둘레길 1시간 포함)
호정소수변산책길을 따라 두리번 두리번 10여 분 오니 이제서야 무직산 등산 안내도가 나온다.
이 곳에서 부터는 급경사나 다름없게 올라가야 한다.
옥새바위를 지나면 또다시 옥새(413)봉( 요산요수님의 블러그)까지 올랐다가 계곡으로 내려 갔다가 옥새바위ㆍ한반도지형 전망대, 삼거리까지 급경사를 오르면 무직산 정상에는 거의 편하게 도달할 수가 있고 정상(578m)에서 부터는 호정소수변산책길까지 오름이 없이 회문산 자락을 조망하면서 평평한 능선을 걷다가 내리막길로 온다.
오르지는 못하고 지나가면서 볼 수 밖에 옥새바위는 처음 접할 때는 뾰족바위가 지나서 볼 때는 옥새바위의 상부 모습이 임금님이 썼던 익선과과 비슷한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온다.
무직산 정상을 거쳐 수변산책로까지 내러오는 내내 트레일 양쪽으로 진다래가 만발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예쁜 자태로 손짓을 하는 듯 하다.
2.3km 거리의 무직산 정상까지 만발한 진달래꽃 짙.연분홍 색갈에 치여 요즈음 한창 피어있는 벚꽃이 존재감을 잃어가는 트레일이다.
4/1~2 속리산 초등 동창 정기모임에서 나누어 준 하얀.쑥절편으로 허기를 미리 잠 재우면서 쉬어 간다.
시작이다. 진달래꽃길이 ~~~
누가 내후년에 칠순이라고 볼까 하는 뒷태를 보여 준다.
▲ 영화 <남부군>은 소설 <남부군>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한국전쟁 당시 실제로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던 사람으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남부군이다. 소설 <남부군>의 작가 이태의 본명은 "이우태"로 1922년 충북 제천시에서 태어나 1948년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신문 기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8개월간 서울신문에서 일하다가 당시 최대의
통신사였던 합동통신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이후 합동통신
이 북한의 관영 통신사인 조선중앙통신사에 흡수되면서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되었다. 이태는 동료들과 대전으로 파견
되었다가 본사의 지시에 따라 일행과 헤어져 전주에서 중앙통신 전북지사 창설 요원이 되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간 후 빨치산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여자의 자궁을 연상케 하는 호정소의 물돌이가 눈에 들어 온다.
--->는 무직산 정상에서 호정소 수변산책길로 내려오는 표시이다.
무슨 바위일까 하고 궁금증만을 가지고서 설마하면서 올라가는데 오르는 내내 바위의 형상이 달라지게 보이고 안내표시도 없다가 옥새바위ㆍ한반도지형 전망대에 가면 아하 이게 옥새바위였구나 함을 느꼈다.
옥새와는 전혀 다른 그저 일반적인 뾰족바위 모습이다.
옆 모습은 펑퍼짐하게 그냥 묵직한 바위로 다가 온 모습이다.
하마터면 지나쳐 버렸을 모습을 먼저 앞서 간 뒷모습만 살짝 찍으라며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이쁜이를 불러 셀카로 인증샷을 한다.
아직도 이 바위의 정체를 알리는 푯말은 없다.
그냥 궁금증을 안고 역시 안내표식이 없는 옥새봉으로 올라 간다.
요산요수님의 블러그를 인용했는데
무직산 안내도에는 410(옥새)봉으로 표시 됨
요산요수님의 블러그를 인용했는데
무직산 안내도에는 410(옥새)봉으로 표시 됨
어떻게 올라가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안은 채 다시 한 번 뒤돌아 본 모습이다.
413(옥새)봉( 요산요수님의 블러그를 인용했는데
무직산 안내도에는 410(옥새)봉으로 표시 됨) 오르는 길의 진달래꽃이 장관이다.
사진에 잘 잡혀주지 않는 진달래꽃 색깔을 어떻게 하면 감탄하며 보고 느끼는 눈으로 마음으로의 색을 표현할 수가 있을까 하며 이때 아니면 언제 이 광경을 보겠냐는 마음에 그냥 작신하게 셔터를 눌러 댄다.
표식이 없는 413(옥새)봉(요산요수님의 블러그를 인용했는데 무직산 안내도에는 410(옥새)봉으로 표시 됨)에서는 급경사로 내려 가 다시 전망대를 향해 급격하게 오르막을 타야 한다.
하지만 급경사라 말을 하지만 탈만한 정도의 트레일이다.
순창 방면의 산들로 이름을 알 수 없어 궁금해도 그림처럼 다가오는 산봉우리들이 마냥 정겹기만 하다.
내일부터 한 3일간 비 예보가 오늘 밤부터 내린다는 예보인데 날씨가 화창하진 많아도 산행하기엔 딱 좋은 날씨이다.
내려 왔다가 전망대를 향해 진달래꽃 능선을 오른다.
소나무 줄기에 홀연히 혼자서 자태를 뽑내기에 찍어 보았는데 느낌의 색은 연출해 내지 못해도 역시 곱기만 하다.
이 바위 위에 옥새바위ㆍ한반도지형 전망대가 있다.
옥새바위ㆍ한반도 전망대
옥새바위(옥새봉385m) : 인장바위로 불리기도 하며 근처에 있는 만일사에서 보면 임금님의 옥새를 닮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 말기에 회문산의 만일사에서 무학대사가 옥새바위를 보며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기원하며 1만 일 동안 기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한반도 지형
물돌이(감입곡류하천)으로 만들어 진 한반도 모양의 지형은 누군가는 호정소를 여성의 자궁으로, 한반도 지형을 남근의 모양이라 여겨,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는 형상이라 말하기도 한다.
계절별로 변화되는 한반도의 풍경은 탐방객들의 사진 속 한반도가 각양각색을 이루게 한다.
전망대에서 본 모습
※413(옥새)봉은 요산요수님의 블러그를 인용
요산요수 블러그 인용 글
▲ 무직산은 회문산과 마주하는 산이기에 산행내내 함께 한다.
회문산(回文山)은 영산(靈山)으로 불릴 만큼 신비로운 산이면서 사연도 많은 산이다.
다섯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위기(五仙圍碁)라는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풍수객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동학 혁명과 한말의 일제 침략에 항거하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 양윤숙(楊允淑) 의병
대장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여수·순천 반란군의 잔당이 찾아들어 총격이 벌어지기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빨치산의 근거지로서 뼈아픈 역사가 깃든 산이기도 하다.
100만 권의 책이 팔려 화제가 되고 관객 70만 명을 기록했던 영화 “남부군”의 빨치산 활동 무대가 바로 회문산 주변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 잡고 700여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다.
또한 김대건(金大建)(1821~1846) 신부가 처형을 당할 때, 3족이 멸하는 화를 면하기 위하여, 동생 김란식과
조카 김현채가 영산인 회문산으로 찾아들어 기거하였으며, 아직도 그들의 묘소가 남아 있다.
요산요수님 블러그 인용 글
▲ 여분산에서 회문산 깃대봉까지.. 이른바 빨치산 능선이다.
"빨치산 / 파르티잔(partisan)" 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 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 된다.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 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빨치산은 일반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6·25 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 전망대에서 본 옥새바위인데 내 눈엔 애기꼬끼리를 닮은 형상으로 다가 온다.
요산요수님 블러그 글
옥새바위(코끼리바위) 너머로 보이는 여분산과 좌측의 용추봉일대는 빨치산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용추봉의 가마골에는 빨치산 전남도당사령부가 있었고... 여분산은 빨치산을 그린 영화 남부군의 원작자 이태(이우태)가
조선통신원 전주지부장으로 근무하다가 UN군의 참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빨치산으로 들어간 산이 <여분산>이다.
이태는 1952년 생포된 후 사상 전향하였고, 이후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를 지냈으며, 회문산을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전망대에서 땡겨 본 암릉
전망대에 오를 때에도 버얼겋게 피어오른 진달래꽃이 무직산 정상으로 가기위 위해 율리 갈림길인 삼거리에 오를 때에도 양 어깨에 걸쳐 빛을 발한다.
외로워? 보이는 산 벚꽃에 눈길을 주지 못해 위로삼아 사진에 담아 보았다.
무직산 등산로 안내 표지판에 조금 못 미쳐 오다가 가지 정리 더미에서 찾아 낸 나무지팡이가 오늘 산행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 냈다.
삼거리에서 정상은 오름이 거의 없는 400m를 가는데도 어김없이 진달래꽃 향연이 이루어 진다.
특이한 점은 이 산을 내려가 산줄기를 올려다보면 이 곳 삼거리가 정상으로 보여 착각을 하게 된다.
해발 578m의 무직산 정상으로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데 커다란 느티나무같은 나무와 소나무를 남겨 두고 주변 나무를 잘라 놓아 전망이 아주 좋게 트이고 하산 후 산줄기에서 정상을 찾는데에도 도움이 된다.
무직산의 무(珷)자는 "옥돌" 을 말하며, 직(織)자는 "짜다" 는 뜻의 "옥돌로 짜여진 산" 이라는 이름 답게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예쁜 산이다..
다음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보이는 부처바위 방향 하산 길은 2-2 무직산 정상~호정소~금평교 편에 이어 진다.
무직산 정상~호정소 ~금평교 2-2 (금평교 ~ 무직산 ~ 호정소 ~ 금평교) 2023.04.04 - https://bkm2400.tistory.com/m/2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