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법주사 답사 (대강초등37 동창회 두쨋 날) 2023.04.02
세조길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 능인교에서 법주사로
金剛門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연혁
신라 혜공왕 12년(서기776)에 진표율사가 7년 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 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 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페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 해 갔다.
일제 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하에 김복진 조각가에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 동란으로 중단 되었다.
1963년 박추남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 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1986 류월단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 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 조성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건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성공 개최 및 세계 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 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 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 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깨로 연도금면적 990m2에 황금 80kg이 소요 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 인력은 총 4,500여 명 이었다.
동창이지만 또한 아저씨벌이라며 기특하게도 챙긴다.
梵鐘閣
쌍사자 석등 雙獅子 石燈
신라 석등 중 뛰어 난 작품중의 하나로 조성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 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 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이 402.8m2,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塑造毘盧蔗那三佛坐像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신불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이 놓여 있다.
인조 4년(1626)에 현진玄眞, 청헌靑憲, 연묵衍墨, 양묵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1747)에 새로 금칠을 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 된 불상은 목조 불상과 소조 불상이 주류를 이룬다.
대부분 네모반듯한 모양의 장중한 형태이며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다.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좌상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고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평가 된다.
사천왕 석등 四天王 石燈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는 석등으로 팔상전 서쪽에 있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뜻한다.
석등 높이가 3.9m이며, 받침돌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받침돌은 밑 받침돌과 위 받침돌이 대칭을 이루도록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은 여덟 면으로 되어 있는데, 한 쪽 네 면에는 창을 내고 다른 쪽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두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 간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보주(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를 두던 받침이 남아 있다.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 양식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신라 혜공왕 때 진표 율사가 법주사를 고쳐 지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圓通寶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권능이 모든 곳에 통한다고 하여 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25년에 새로 지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정면 세 칸, 측 면 세 칸으로 된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보다 정면이 약간 크다.
공포는 기둥위에만 주심포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다포계와 익공계 수법이 혼용되어 있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뻣어 있는 사모지붕이며, 지붕마루의 가운데에 세워진 항아리 모양의 장식은 마치 석탑이나 석등의 꼭대기 부분처럼 보인다.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으나 고대 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로 평가 된다.
공포 :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 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
주심포식 :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것
다포계 :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건축 양식
익공계 : 우리나라 전통적인 목조건축물의 기둥 위에 새 날개처럼 뻗어 나온 첨차식 부재로 장식적인 효과가 있는 전통 건축 양식
幢竿支柱
당간이란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宗派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當百錢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 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 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 경) 이 곳 철당간은 22m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石蓮地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 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 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연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지금부터는 모두 다 가버려 바쁘게 사진만 찍고 내려 가야 한다.
철솥
법주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cm에 무게는 20톤에 달한다.
큰 사발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여 신도가 운집하여 있은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년대, 제작자 및 제조 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여 선두자들 중에는 말미인 세 사람을 솔밭 조각공원 가까이 가 따라 나섰다.
아침에 관광버스가 우릴 내려 준 곳에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전체적인 모임에도 찬조를 한 ㅇㅇㅇ친구의 호떡과 옥수수 후원으로 친구들이 맛있게 먹으면서 담소 나누고 버스 오기를 기다린다.
버스가 와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 인 말티재를 향해 출갈을 한다.